대가리에 총 맞은 것 같다.(스포 아님) 감상평으로 무엇을 써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막막하게만 느껴진다.
네모의 꿈은 사실 아나키즘적인 시대를 초월한 명곡일지도 모른다. 네모의 꿈 하니 생각나는 CF였던가, 어떤 쇼츠에서 봤던 영상이 기억난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에게 한 사업가가 바닥에 네모 모양 금을 그어두고, 밖으로 나가지 않기만 하면 돈을 주는 그런 내용의 영상이었다. 예상할 수 있듯 그 네모 빗금이라는 굴레 속에서 친구도, 건강도, 심지어는 가족들의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자리를 지키고 벼락 부자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자기 자신과 타자의 유일한 다른 점은 스스로를 100% 타자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그 어떤 존재도 본질적으로는 ‘남’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인정도, 사정도 없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이는 자명한 듯 하다. 공감 능력이라는 것은 그 타자와 자아의 간극을 쉽게 혼동하는 인간의 특질인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은 스스로 완벽한 타인이 됨으로써 인간으로써의 한계를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영화가 다 끝나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많은 복선들이 즐비해있다. 교훈적인 틀에 박힌 작품들과는 대조적으로 파이트 클럽은 인간의 욕망, 본성적 악함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설파하는 듯 하다. 그 집단적 수렴이 아나키즘과 반자본주의라는 점은 유감스럽지만 말이다. 파이트 클럽에서 ‘격투’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폭력성을 건드리는 행위는 작 초반 엄격한 규율 아래 행해져왔다. 상대가 탭을 치면 멈추며, 그들의(타일러의) 싸움에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는 인명에 대한 도덕관념이 해이해져갔고 사람을 죽일 듯 패는 지경에 이른다.
(이를 폭력의 수단화라고 보는 것이 맞을까? 그들이 말한 대의는 거시적 관점에서 작은 분란과 소동에 불과할 뿐인데, 집단의 광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말라라는, 주인공과 가장 가깝고, 가장 유사한 내면을 공유했던 인물은, 작품 전반에서 개입함과 동시에 주인공을 관찰하는 역할을 맡는다. 퇴폐적이고 결여된 도덕성의 상징으로 보였던 그녀지만, 흑화한 타일러의 모습을 보며 그녀조차도 한수 접게 된다. 그녀가 작품의 감초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주인공 본인의 내면세계 속에서 ‘타자’를 담당했던 것은 타일러였지 말라는 아니었다. 혹자는 알파메일 서사, 수동적인 여성의 어쩌구 를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다시 돌이켜 보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멋대로 주인공을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 모든 건물이 무너지는 광경을 두명이 손을 잡고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쓰는, 높은 곳에서 불꽃놀이를 보는 주인공과 히로인의 장면과 오버랩되었다.
이분법적인 사고 속에서 벗어나 작품을 작품 그대로 보고 싶은데, 이 방식이 쉽고 강력해서인지 참 어려운 것 같다. 수동적이고 내성적인, 암 환우 모임에 참석해 밥의 품에 안겨 울던,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이케아 가구를 수집하는 이름하여 집꾸가 취미였던 주인공은 지금 말로 대표적인 사회의 톱니바퀴를 담당하는 에겐남이었다. 여기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 마초적이고, 폭력적이며 정열적인 남자(꼭 이런 마초성과 남성성이 부각되어야만 사회의 반항아, 이단아가 될수있는가 묻고 싶다면 말라를 보라.) 타일러가 나타나고 주인공은 점점 그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심취되어 간다.
폭력이 수단화되고 정당화되는 것이 더 안좋을까, 혹은 미화되고 우상화되는 것이 더 안좋은 일일까? 밸런스게임 소재가 떨어져 찾고있었다면 한번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는 것도 좋아 보인다. 애석하게도 이 영화는 둘 다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저 승자도 패자도 모두가 끝나면 웃었던 ‘건전한 모임’이었던 초반과는 다르게, 그들의 파이트 클럽은 결집하고 단결하여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발판이 되었다. 타일러의 masculine한 남성성은 그들을 하나의 거대한(그리고 맹목적인) 목표의 수단으로 만듦과 동시에 일종의 우러러볼 수 있는 동경과 미학적인 영역으로 비추어지기까지 한 것 같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총을 겨누고 쏨으로써 주인공은 타일러를 세상에서 없애버렸다. 그리고 폭발하는 건물들 사이로 죽어있는 주인공을 허망하게 바라보며 좌절하는 말라로 막을 내릴줄 예상했는데… 총을 쏘는 행위는 타일러를 없애기보다는 되려 결합, 굳이 정확히 표현하자면 흡수/지배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어려서부터 타인을 때리거나 아프게 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고 배우는걸까? 너무 근본적이고 당연한 일이라 나도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그런 질문같지도 않은 질문이다. 타인을 해치면 안된다는 도덕성의 원천은 당위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학습되어 온, 길들여짐의 산물이 아닐까. 잔인한 장면, 아파하는 장면을 보면 나도 고개를 찌뿌리듯이 타인의 아픔을 온전히 타자화하지 못하고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기에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주인공은 스스로가 아닌 타일러를 만들어냄으로써, 그 폭력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을 잃고 타일러가 주인공을 집에서 재워주겠다고 제안하며 ‘단 한대만 자신을 힘껏 쳐보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초반에 연출된다. 주인공은 그런 이상한 부탁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한사코 거절하지만, 그는 결국 타일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해 냈다. 아프리카에 있는 기아들이 우리가 급식을 남기지 않아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하듯이, 어쩌면 우리는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정한 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사고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