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때 작성한 국어 수업시간 자유탐구 보고서인데, 그 때 쓴 글의 내용이 지금보다 훨씬 짜임새있고 필력도 좋았던 것 같다. ChatGPT와 AI가 얼마나 우리의 필력과 상상력에 악영향을 주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쿼런틴” 소설을 통한 “인격에서의 테세우스의 배” 논제 고찰
1. 탐구 동기
소설 “쿼런틴” 속 주인공은 모종의 MOD라는 레트로 바이러스를 뇌 속에 주입하여 신체나 정신적 능력을 강화시키거나 감정을 배제하는 등 업무나 작업의 효율을 증대시키기 위해 감각을 조작하고, 뇌의 일정 부분을 차단하기도 한다. 이러한 MOD를 적용하면서 주인공은 주어진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면서도 정신적인 소모를 겪지 않지만 해당 시간동안은 자신의 자아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조종하는 것 같다는 괴리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의식 혹은 인격의 본질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만든다. 또한 책의 뒷부분에서는 양자역학 이론과 관련하여 사람이 단지 관측하는 행위만으로 그 대상의 파동함수를 수축시킨다는 이론에서 입각하여 여러 파동함수중 하나를 선택적으로 수축시키는 방향으로 불가능한 일들을 해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단순히 사람의 눈으로 관측하는 것만으로 파동함수를 수축시켜 한 가지 고유상태로 결정지을 수 있다면, 거기에 더하여 사람이 임의로 고유상태를 결정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에 대하여 책에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자역학적 관점을 조금 더 인간의 인격과 심리적 본질에 관한 방향으로 확장하면 또다시 탐구 주제인 ‘인격에서의 테세우스의 배’ 문제를 마주할 수 있다. 이번 탐구를 통해 인간의 본질이라고 불리는 의식의 존재에 대한 정의의변천사를 짚고 넘어가며, 인간의 의식의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바뀐다면 변화한 인격을 자신의 인격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고찰할 것이다. 또한 인격 자체의 존재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 현재의 과학을 이용하여 입증할 수 있는지, 현대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의식에 의한 관측은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근대부터 지금까지 제시되어왔던 많은 양자역학 추론과 해석을 참고하고 “쿼런틴”에서는 어떤 해석을 참고하였는지, 인간의 의식이 과연 실제로 거시적인 물체를 물리학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하여 고찰할 것이다.
2. 이론적 배경
- 양자 얽힘
양자 역학에서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또는 간단히 ‘얽힘’은 두 부분 계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일련의 비고전적 상관관계를 말한다. 얽힘은 두 부분계가 공간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입자가 일정한 양자 상태에 두어 두 입자의 스핀이 항상 반대가 되도록 하자. 만약 두 입자가 매우 먼 거리에 떨어져 있고, 이 때 한 입자를 관찰하여 그 입자가 위쪽 방향의 스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는 즉시 그 계와 얽혀있는 다른 입자의 스핀이 아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정보가 순식간에 한 계에서 다른 계로 이동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양자 얽힘이 등장한 이후에 다양한 철학적 논의들이 꾸준히 진행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이 양자얽힘 현상이 국소성의 원리를 위배한다는 사실이다. 국소성의 원리는 계의 상태에 관한 정보가 항상 그 계의 주위를 통해서만 매개될 수 있다는 원리로, 만약 양자 얽힘 현상에 의해 정보가 전달된다면 주위를 통하지 않고도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 국소성의 원리와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양자 얽힘 과정에서 실제로 정보가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고, 이를 위해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이 대두되게 된다.
- 테세우스의 배의 역설
미노타우르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서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기념하기 위해 아테네 인들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배를 팔레론의 디미티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배가 오래되어 판자가 썩으면 그 판자를 떼어내고 새로운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 커다란 배에서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고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 라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같은 방법으로 낡은 판자를 계속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부터 테세우스가 탔던 원래의 배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이때 새롭게 바뀐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테세우스의 배의 역설의 기본 골격이다. 이 역설의 심화 버전으로, 테세우스의 배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갈아 끼운 낡은 판자들을 버리지 않고, 그 것으로 다시 테세우스의 배와 똑같인 생긴 배를 만들게 되면 이 배는 무엇인지에 대한 역설도 있다. 이러한 역설에 대한 여러 답변 혹은 해석들을 크게 분류하면 총 4가지가 되는데, 판자를 바꾸어 결국 모두 새 부품이 되어버린 배와 낡은 부품들을 모아 다시 만든 배 2척을 각각 테세우스의 배로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의해 의견이 나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의견에서 공통적으로 “테세우스의 배”라는 정의에 대한 모호성이 내포되어 있다. 테세우스의 배에 관해 고찰하다 보면 철학적 질문에 다다르게 되는데, ‘질적으로 다른 대상들이 수적으로 동일할 수 있는가?‘, ’물리적 사물의 정체성이 그 물리적 부분에 의해 결정되는가?‘ 라는 궁금증으로 이어지게 된다.
- 동일성
동일성(同一性, identity) 란 다른 사물과 대립구분 되면서 변함없이 동등하게 존재하는 개개의 성질을 말한다. 이 정의는 여러 역사 속 철학자들의 이론에 의해 알 수 있는데, 고대 철학에서 플라톤은 ‘이데이설’을 주장하며 이성에 따라 파악된 이데아의 세계 속 감각적 사물에 대비된 범형 이데아를 실체로 여겼다. 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언가에 의해 잠재적으로 있을 수 있는 질료가 형상에 의한 제약에 의해서만 구체적 개체로 현실에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중세 철학의 본질존재와 현실존재의 구별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근대에서 스피노자는, 그 자신 속에서 그 자신에 따라 생각할 수 있는 자기 동일적 실체는 신밖에 없다고 했다. 수학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식별할 수 없는 두 개체는 없다고 하는 식별불가능자 동일성 원리를 내세워, X가 가진 모든 성질을 Y과 가짐에 동시에 모든 성질을 X가 가질 때 X=Y가 성립하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동일성은 존재 자체의 탐구가 필요하므로 과학과도 연관이 깊은데, 생물학에서는 생물 단위의 개체가 이화와 동화작용을 통하여 항상성을 유지하고 엔트로피를 외부로 배출하면서 활동한다.
3. 탐구 내용
- 책 ‘쿼런틴’ 속 양자역학적 견해와 사물의 존재에 관한 고찰
책 ‘쿼런틴’ 속에서 주인공은 MOD에 의해 자신의 존재와 인격성이 침해당한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MOD로 인해 자신이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는 책 ‘쿼런틴’ 속에서 드러난다.
“MOD가 당신으로 하여금 경계 태세를 취하게 한다면, 경계 개념에 반하는 다른 일들은 글자 그대로 불가능해진다. 따분함, 산만함, 조급함 따위의 사고(思考) 양식으로부터 완전히 절연되는 것이다. 비(非)강화 상태에서 나는 좀비들에 관해 농담을 할지도 모르지만 강화상태에 들어가면 MOD야말로 신경 테크놀로지의 진정한 성과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신기하고 특이한 정신 상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상태의 선택지를 의도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선택된 행위에 집중하고, 강화된 형태로 그것을 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쿼런틴 p108
앞서 언급한 MOD는 위 글의 내용처럼 사람이 어떠한 일을 수행할 때 이 수행에 방해가 되는 잡념이나 행동들을 두뇌 선에서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그 일에 100%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뇌 속 장치인 것이다. 우리는 뇌 속에 마이크로칩을 심거나, 뇌를 조종하는 등의 SF적인 요소를 생각하면 기본적으로 뇌의 기억(저장)공간을 무한히 늘려 무엇이든 기억할 수 있도록 하거나, 감정을 조종하여 쾌락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소위 말하면 뇌 과학에 대한 자극적인 면모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제로 뇌과학이 발전하여 소설 ‘쿼런틴’ 정도의 과학기술에 도달하게 되면, 상술한 내용들 보다는 MOD와 같이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감각이나 신체기능 등을 일부 향상시키는 등 우리 실생활에 유용하게 사용되지만, 도덕적, 윤리적 문제는 적은, 단지 신체 기능의 연장을 위한 장치가 만들어질 확률이 높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강화상태를 해제하면 다시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이를 자신이 컨트롤 가능하니까 이러한 기술의 진보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생각을 조금만 확장하여 보면 옮겨 적은 위 글에서도 알 수 있듯 업무에 반하거나 맞지 않는 행동에 대하여 감정이 있는 자신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결과, 나 자신이 설정한 업무를 달성하려고 어떤 수단이든 사용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예시로 아래 ‘쿼런틴’의 인용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애인이 죽은 현장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강화MOD를 켜고, 자신의 애인의 주검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놔둔 채 도망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한탄하는 주인공을 들 수 있다.
“몸을 웅크리며 지면 위를 굴렀다. P4 덕택이다. 나는 피를 흘리고, 헐떡이며 깨진 유리 위에 일이초 동안 누워 있었다. 집 쪽에서 불길이 솟구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중략) … 카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쳤거나, 빈사 상태도 아니다. 폭발을 가로막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즉사였을 것이다. 그 이래 같은 생각을 수없이 해 보았지만, 결론은 언제나 똑같았다. 보통 사람이 이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그는 그 즉시 목숨을 걸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을 것이다. 충격을 받고, 당황하고, 자기 눈을 의심하면서, 가장 위험하고 무익한 행위를 저질렀을 것에 틀림없다. 그러나 좀비 보이스카우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몸을 돌려 그 자리에서 떠났다. 그리고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는, 살아남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쿼런틴 p81~82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깊게 생각했던 부분 중에 하나이다. 앞선 단락에서는 MOD의 장점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MOD가 실존하면 어떨지를 상상하면서 뇌 과학의 산물의 긍정적 영향을 생각하며 책을 읽었지만, 이 대목에서는 과연 MOD를 장착한 사람은 우리가 정의하는 ‘인간’이 맞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책의 묘사처럼 주인공은 마치 자신이 이성의 포로 혹은 좀비가 된 것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 걸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은 오히려 인간이 아니라 로봇과 같이 보인다는 말이 격하게 공감이 갔던 대목이었다. 그렇다면 MOD의 강화 상태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그 시간동안 인간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인가? 그저 감정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만을 보고 인간 혹은 인격을 파악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종의 이유로 감정이 사라진, 혹은 결핍된 사람도 존재하며, MOD의 강화상태 중에서도 필요에 따라 감정이 생기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요소들이 인간 혹은 개인의 한 인격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인가? 혹자는 인간의 인격이 하나로 결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변화하며 여러 가지 인격들이 존재하는데, 이 중 주요한(지배적인) 인격이 그 사람의 대략적인 성격과 사고방식 등을 결정한다고 본다. 애초에 자신의 인격이라는 정의 자체를 하나의 존재로 국한시킬 수 없는데, 그렇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인격들 모두를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인격과, 외부적 요인(술이나 각종 약물 들이 될 수도 있고, 이 책에서는 MOD) 에 의한 성격 혹은 인격 또한 자기 자신의 일부로 이미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수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점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이 실은 ‘비천한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럴 경우에도 <앙상블>은 여전히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남았을 것이다. 충성 MOD가 그것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환상이 깨질 것을 두려워하든, 내 신념이 옳았음을 알고 환희를 느끼든, 충성 MOD의 존재 앞에서는 결국 무의미한 일에 불과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굴려 보았지만, 그 이상의 결론을 얻을 수는 없었다.” - 쿼런틴, p175앙상블>
<앙상블> 이란 주인공의 뇌에 모종의 이유로 심겨진 칩으로, <앙상블>이라는 프로젝트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심을 발휘하는 ‘충성 MOD’를 갖고 있다. 이로 인해 나 자신의 존재 이유가 <앙상블>이며 <앙상블>을 위해 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이를 통해 행복을 느끼게 되어 버린다. 제 3자의 입장에서 <앙상블>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마치 광신도적이고 병적인 집단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책속의 그는 뇌 속에 이미 <앙상블>을 위하여 헌신해야한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기에 그의 행동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책의 후반부에서 그는 <앙상블>에 대한 복종이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이를 거부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들을 통해서 <앙상블>에 대한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앙상블>의 수뇌부가 무언가 잘못에 빠졌고, 이를 바르게 고쳐야 한다는 식으로 재해석하여 교묘하게 <앙상블>의 의도를 벗어나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앙상블>의 사례와 같이 사람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하는데 이러한 진보된 기술을 사용하는 행위를 악이라고 느끼고 혐오감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존재, 혹은 자신의 인격의 존재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_대다수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경험하는 일들에 의해 농락당하며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고, 그들의 인격은 자기들이 제어할 수 없는 영향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뭐가 나쁘단 말입니까... 본인이 그것을 원하고, 또 그것에 의하여 행복해질 수 있다면?”_ _“하지만 누가 행복해진다는 거죠? MOD를 쓴 사람은 아녜요. 그 인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을 테니까.”_ _“그건 상당히 고풍스러운 생각이군요. 변화는 자살과 마찬가지라는 식의.”_ - 쿼런틴, p142 위 글은 주인공과 미스 장이라는, 같은 <앙상블>을 위해 일하는 사람과 업무 이후에 나눈 대화이다. MOD를 이용하여 나 자신이 행복해진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니냐는 미스 장과, MOD를 사용한 순간 ‘나’라는 존재의 의미 자체를 잃어버려, 행복하더라도 그것은 ‘나’ 의 행복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반론을 하는 주인공의 언쟁에서의 쟁점과 그 의견들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벤담의 공리주의에 따르면 최대 다수가 최대의 행복을 누려야하기 때문에, 잡념으로부터 벗어나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MOD를 보급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나’의 반론에 따르면 MOD를 쓴 사람 자체를 인간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며 이를 반박한다. 이 책에서도 MOD의 사용으로 인한 직접적인 부작용(MOD를 조작하여 특정인이 원하는 데로 다른 사람을 조종한다던가, 살인기계를 만드는 등의 행위)는 묘사되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이 MOD를 켰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주도권(제어권)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만으로 ‘MOD를 활성화 했을 때 ’나‘라는 인격을 잃어버리는 것이 확실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순적이지만 인격이나 인간의 존엄, 인격 등이 사회적으로 대두가 되고, 인간의 존엄성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타이밍은 평화롭고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일 때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고 직접적으로 이로 인해 생존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이다. 어쩌면 ’인격‘ 혹은 ’나 자신‘이라는 정의 자체가 항상 동일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생각했던 일부분의 존재 자체가 위협을 받을 때 정의가 변하고, 나 자신과 나 이외의 것을 구분하는 작업이 진행되는 것 같다. 앞서 이론적 배경에서 소개하였던 “테세우스의 배” 관점에서 본다면, MOD를 이용하여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조종하는 행위도 테세우스의 배에서 낡은 판자를 덧대는 것처럼 자신의 인격의 일부분을 도려내고 그 도려낸 부분에 완벽한 인격을 이식하는 행동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MOD를 이용한 기술들은 사물의 물리적 본질이 바뀌었을 때 그 정의가 바뀌는지에 대한 논쟁 대신, 인격의 일부가 바뀌었을 때 그 인격을 원래의 인격과 같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정신적인 테세우스의 배, 혹은 동일성 문제와 직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의 개인적 의견으로는 애초에 우리가 인격의 정의 자체를 모호하게 세웠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껏 인격의 존재 자체가 침해받은 적이 없었기에 이러한 오류와 혼란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인공지능과 AI가 인간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인격과 자아를 가지게 되거나, 소설 ‘쿼런틴’처럼 자신의 인격을 잠시 제어하거나 바꿀 수 있는 기술들이 만들어진다면 개념,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이러한 발전에 대하여 깊이 고찰해야할 때가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1. 양자 역학적 관점에서 인격의 동일성에 관한 고찰 양자 역학은 기본적으로 고전 역학적 관점, 즉 상식 수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과는 반대되는 결과를 우리에게 안겨준다는 것이 일반인에게는 가장 큰 의의기도 하다. 가장 유명한 예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있는데, 1/2 확률로 방사성 물질이 담긴 병이 깨지도록 설계한 밀폐된 방 안에 고양이를 넣어놓고 시간이 지나 관측을 진행하게 되면 그 고양이는 죽어있거나, 혹은 살아있게 된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관측하기 전까지는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있는 상태가 서로 겹쳐서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고양이는 죽어있으면서도 살아있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관측되지 않은 물체는 여러 고유상태가 가능한, 즉 얽혀 있는 상태가 되며, 물체의 관측을 통하여 이러한 고유상태들이 하나의 결과론적인 고유상태로 고정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마치 인간의 ‘관측’이라는 행위가 매우 중요한 기작으로 작용하였고, 인간이 마치 고양이의 살아있거나 죽어있는 상태를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 혹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책 ‘쿼런틴’의 작가는 이러한 방향으로의 상상력을 더욱 증폭시켜 인간의 뇌 중 일부 부분이 이러한 고유상태를 조종하는 부위로 발달하게 되어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열쇠 없이 모든 문을 열고, 주사위를 던져 나올 숫자를 맞추는 등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이러한 설명으로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결과에는 2가지 전제의 오류가 있다. 첫 번째로 인간이 관측을 통해 고유상태를 결정한다는 사실(실제로 인간의 관측이 아닌 다른 기작에 의해 고유상태가 결정됨)이고, 두 번째로 첫 번째 가설이 가능하다고 했을 때 이러한 고유상태의 결정을 자신의 임의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열쇠 없이 문을 열고 주사위의 숫자를 알아맞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직 결정되지 않은 심리상태를 관여하였다면 이 책은 과학적인 내용의 하드 SF 소설이 아니라 조금 더 철학적인 책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앞서 고찰해 보았던 MOD에 의한 심리 상태의 조종과 같이 다른 사람이 나의 인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이 상황 또한 MOD에서의 테세우스의 배 논제와 마찬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추가로 덧붙이자면, 인간 세포와 뇌의 활동은 1 마이크로 초 정도의 단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1나노초 이하의 단위에서 진행되는 결맞음(고유상태가 결정되는 기작)을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다. 또한 양자 얽힘, 즉 두 양자간에 한 쪽이 관측되면 다른 쪽이 관측된다는 성질을 생각해보면, 고유상태를 조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뇌속 어떤 부분이 고유상태를 결정한다고 하면, 그 부분 자체의 고유상태는 뇌속에 있어 누군가에 관측되지 않은 상황이므로, 뇌 속 부분의 고유상태를 결정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이를 해결하려면 국소성의 법칙이 위배되는 상태에서의 양자 얽힘이 도입되어야 한다. 3.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인격의 동일성에 관한 고찰 형이상학에서 동일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인격의 동일성, 다시 말해서 어디까지가 우리 사람의 인격이고, 이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시점부터 자신의 인격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개념적인 내용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어떠한 인격이나 사람의 내면 상태와 관련이 있는 자유의지와 의사에 관해 실례를 들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재판에서 어떠한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때 심신미약의 상태에 있었다면 이 상태에서 죄가 감형되곤 한다. 분명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심신 미약 상태였든 아니든 그 사람이 죄를 저지른 것은 맞는 것인데 왜 벌을 어떤 사람은 덜받고 더 받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모호성 또한 자신의 인격, 혹은 자유의지에 대한 명확한 경계성의 부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정의할 수 있을 때 동일성이 생긴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의견을 차용하여서 자기 자신이 자신을 정의하지 못하면, 혹은 자기 인격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순간, 그 때부터 자신의 인격에 대해서 경계선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물론 앞서 설명했던 <앙상블>처럼 모종의 충성심이나 감정이 마치 자신이 실제로 느껴서 만들어지는 감정인 것처럼 위화감 없이 동작하는 경우에는 이렇게 자기 자신이 자신의 인격의 변화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이렇게 감정을 자연스럽게 주입하는 기술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점까지는 고려해보지 않아도 되겠지만, 인간의 뇌와 감정에 관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전에 이러한 점에 대해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숙고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4. 탐구 결과 책 ‘쿼런틴’ 속에서 주인공은 MOD에 의해서 자신의 성격 혹은 인격이 제어 당하며, MOD가 활성화 되었을 때의 인격은 자신이 아닌 마치 좀비 같은 상태라고 털어놓았다. 주인공의 상황과 같이 모종의 요인에 의해 자신의 원래 의도가 아닌 방향으로 감정을 느끼고 사고하고 있다면, 이 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자신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 혹은 자신의 인격의 존재가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하나의 의견이 있었고, 원래의 인간도 여러 가지 내면의 인격이 존재하는데, 외부 요인에 의한 인격 또한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다른 의견도 존재하였다. 양자역학의 일부 실험에서는 인간에 의한 관측이 중요한 요인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인간은 고유상태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뇌속에 가지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이를 자신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은 더더욱 없다. 그래도 만에 하나 책에 묘사된 것처럼 인간이 고유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면, 이는 앞서 고찰하였던 MOD를 이용한 인격의 변화와 구분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외부인이 직접적으로 타인의 인격에 손을 대게 되는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형이상학적 동일성에 대하여서는, 형이상학에서 주장하는 동일성과, 탐구주제인 인격의 동일성에 대한 정의 자체가 상이하였기에 마약이나 술과 같은 요인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을 때 감형받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는 논제에서 시작하여 의견을 펼쳐 보았다. 인격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장소와 만나는 사람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어쩌면 이러한 변화를 우리가 하나하나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듯, 외부 요인에 의한 변화도 다른 상황의 개입 없이 자기 스스로 변화를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모든 요인을 포함한 것이 자신의 전체적 인격일 수도 있다. 마치 팔이 없는 사람이 의수를 하고 생활하는 것을 볼 때 그 의수가 신체의 일부분이 아닌 것처럼 보통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사람은 신체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앙상블>앙상블>앙상블>앙상블>앙상블>앙상블>앙상블>앙상블>앙상블>앙상블>앙상블>앙상블>앙상블>“진정한 <앙상블>이란 무엇인가? 그들이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은 단 한 가지, <앙상블>을 자처하는 연구기관의 연합은 가짜이며, 사기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 (중략) … 내게는 <앙상블>에게 충성을 다한 합리적인 이유 따위는 없는 것이다... 내게는 오직 충성 MOD라는 해부학적인 사실이 존재할 뿐이다. 이 MOD가 가리키는 진정한 <앙상블>이란 나의 몸이라고 믿을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하고... 이것은 터무니 없는 난센스이다. … (중략) … 그 때 머릿속에 해답이 번뜩였다. 종교 개혁에 참가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 쿼런틴 p189~190앙상블>앙상블>앙상블>앙상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