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장편 소설인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작가의 자아를 투영한듯한 주인공 경하는 제주도에 살고 있는 인선이라는 잡지사 근무 시절부터 알게 되었던 친구와 모종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제주에서 홀로 살며 작은 목공업을 하던 인선은 손가락 절단사고로 서울로 이송되어 입원하게 되었고, 키우던 애완용 앵무새인 ‘아마’ (Maybe라는 뜻일지, ‘Amar’를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만, 아마도 후자를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가 삼 일간 물을 먹지 못 하면 죽게될 것을 알기에 부득 경하에게 아마를 위해 제주도의 자기 집으로 찾아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폭설이 뒤덮은 제주는 본래의 그 풍경을 잃고 아주 이국적으로 변하였다. 그의 집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와 담담이 전개되는 전경이 목가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경하가 인선의 집에 도착했을 때 앵무새 아마는 이미 죽어있었다. 그러나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환상처럼 앵무새 아마는 다시 살아 움직이고, 인선과 재회하며 주인공 경하는 그의 집에서 인선이 찾아놓은 제주도의 참혹한 사건들의 기록을 대면하게 된다.
폭력은 그 무엇으로도 미화되거나 변명될 수 없는 죄임이 분명하다. 수만명의 사람들이 총살당한 그 해변과, 단지 음식을 위해 공산당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 가족까지 끔찍하게 몰살당한 사상 전쟁의 참혹성을 단지 민주 정부에 대항한 공산주의자들의 폭거로 치부하기에는 잘못된 점이 많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는 귀를 기울이되 이것이 정치적으로, 또 새로운 사상의 앞잡이로 사용될 여지를 주어서는 또 안된다. 문학은 현실세계와의 연결고리 없이 그 자체로 순수한 예술성을 가지고 고유성을 가지지만, 사회 비판적이고 시대상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에 대해서는 시대성을 충분히 반영하여 평가하고 음미하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곡해하거나 흐린눈을 뜨거나, 회피해서는 안된다. 직시해야만 한다. 한 작품은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insight를 제공하며 사람들에게 흥미와 관심을 부여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역사에 대한 어떠한 해석을 바꾸거나 작용으로 관여하는 것은 경계해야할 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