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픽
- 바빌론의 탑
- 네 인생의 이야기
-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 다큐멘터리
바빌론의 탑
네뷸라 상을 받은 단편이다. 성경 속 바벨탑을 건축하고, 실제로 하늘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 편평한 땅과 같은 우주는 실제로는 도넛과 같은 모양으로 휘어 있기 때문에 하늘의 끝에 도달한다면 다시 바닥으로 뚫고 나오게 된다. 이 세계에서는 땅은 평평하다. 지구는 구형이 아닌 평면이다.
이해
뇌의 100%를 사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라는 주제에 대한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과연 인간의 지성이 올라가게 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본질적 패턴인식의 생물인 우리는 이 세계의 패턴으로부터 무엇을 추론해낼 수 있을까? 우리 뇌의 기능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소설에서 묘사된 압도적인 우월성과 초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본인과 같은 호르몬 주사를 맞은 상대와 결국 만나고, 생각의 차이를 발견하고, 결국 그 마인드 배틀에서 패배하게 된다. 지성과 사고의 극치에 올랐음에도 둘의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관은 왜 달랐을까? 진리는 한 점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론을 펼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한 사실은 인간으로부터 추구되고 도달되어질 것으로 여겨지는 완벽성은 소설 속에서 묘사된 초인류의 지성과 신체능력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연약함과 그 존재론적 회의를 열반에 가까운 완벽한 존재가 되고도 느끼는 것을 보면.
영으로 나누면
거의 플롯이 유사한 그렉 이건의 단편이 떠올랐다. 쿠르트 괴델의 불완정성 정리에 의하면 수학은 모든 것을 증명하고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완전한 참으로 생각되기 쉽상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철학적 접근이라기보다, 명제를 통한 논증에서의 전제의 필요성 정도로 보아도 좋은데, 어떤 모순이 없는 체계를 구성하게 된다면, 그 체계 내의 어떠한 명제는 항상 참이지만 이를 그 내부 요소들을 이용하여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학의 어떠한 학문에서는 항상 ‘공리’를 정의한다. 그 공리는 증명 없이 참으로 간주되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아무도 노력하지 않는다. 즉 어떠한 공리들의 집합(set)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새로운 수학 체계를 창안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수학이 모든 학문과 기초 지식의 뿌리와 같은 근원적 요소라기보다는 천공의 섬 라퓨타처럼 공리라는 불안전한 발판 위에 놓여있는 개개의 나무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불완전성정리에 대한 나의 상념은 여기까지만 풀고, 책은 여주인공 수학자가 모든 수학적 논증과 논리가 거짓이 되도록 하는 증명을 찾아내고, 이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심리 묘사를 표현하고 있다.
네 인생의 이야기
영화 컨택트(Contact)의 단편이 되는 소설.
덕분에 컨택트를 다시 보려고 생각중이다. 어느날 문득 지구 곳곳에 설치된 반사경과 같은 물체를 통해 괴상하게 생긴 생물체는 인류와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인언어학자인 주인공의 이야기와, ‘너’로 불리우는 1인칭 화자의 딸에 대한 묘사가 겹쳐서 저술된다. 외계생물체는 일곱개의 사지(이 떄는 칠지라고 해야하나?)와 눈을 가져 헵타포드라고 불리우며 인간과는 전혀 호환되지 않는 두 개의 언어를 구사한다. 음성언어인 헵타포드 A와, 기록 언어인 헵타포드 B이다. 여기서의 기록언어는 이런 것이다. 우리가 정지 사인을 본다면 이를 ‘정지 사인’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은 정지 사인의 마크 자체는 그 자체로 음성적인 언어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 신호를 보면 멈추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기록 언어인 것이다. 모든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와 다른 점은, 문자는 그 문자에 일대일로 대응되는 소리(혹은 발성, 음성)이 존재하며 이를 발화를 통해 읽어내는 과정 혹은 기록을 통해 그려내는 과정을 통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부호화하고 복호화한다. 그러나 헵타포드의 기록언어 B는 우리의 정지사인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기하학적 문양이며 이를 관찰함으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만 여기에 정확히 대응되는 언어가 없다. 우리가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들이 이러한 언어를 발전시키고 그 언어를 통해 인류에 접촉할 수 있을 정도의 발전을 일구어낸 것은 그들의 언어와 문자에 체계성이 있음을 반증한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원인과 결과를 중심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바라보는 인간의 사고와는 다르게 시간과 인과개념에 구애받지 않고 동시적으로 인지하는 것이 그들의 사고의 과정인 것이다. 그렇기에 앞과 뒤, 시작과 끝이 있는 직렬적인 문자 시스템을 채용하지 않고 한 눈에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동시성을 기반으로 한 기록언어를 창시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시간에 대한 흐름으로, 인과적으로 기술하는데 반해 헵타포드의 사고방식은 마치 해석역학을 인지적인 영역으로 옮긴 것 과 같이, 시간이 아닌 변분법적이고 라그랑주 역학에 가까운 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서로 교차되었던 두 이야기는 마지막에 이르러 연결된다. 이러한 구조와 층위를 가지는 소설은 많지만 마치 1 2 3 4의 순행적 구성이 아니라 1 4 2 3 (만남) 과 같이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결국엔 동시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크게 중요하지 않으므로 이를 동시적이라고 기술하는 것 조차 적확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구조를 채용한 것이 작품 전체에 대한 주제의식과 의미의 완결성을 부여한 것 같아 아주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다.
영화는 직접 시청하진 않고 요약영상과 나무위키의 정리 내용을 봤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의 상상력과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영화에서 따로 추가하고,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추려낸 것이 내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소설 그대로 영화가 나왔다면 더 의미있지 않았을까. 더 대중적으로 인기를 구가하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일흔두 글자
이름 붙이기(명명하기)는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끊겨가며 읽기도 했고 흥미가 떨어져서 서평을 쓸 정도는 아닌듯.
인류 과학의 진화
너무짧아
지옥은 신의 부재
실제로 관측가능한 신과 지옥, 천사와 기적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지옥에 갔다는 사실이 관측되었을 때, 우리는 지옥에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어떠한 관점에서 천국과 지옥이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을 바라봐야하는지 가정법을 통해 서술한다. 사실 묘사된 천국과 지옥은 현실의 거울 세계에 가까운, 일종의 관측가능하지만 교류불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못자국을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던 보고 말씀하시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어떠한 천상의 빛과, 천국과 지옥에 대한 심판에 부분에는 이단적이고 논쟁적인(현대 기독교에 입각해서 볼 때) 부분이 많지만 가시화된 천국과 지옥, 천사와 신의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죄를 범하고 지옥을 염원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칼리아그노시아’ 는 뇌의 특정 부분에 작동하여 타인에 대한 아름다움에 관한 스위치를 모두 꺼버린다. 성인이 되어서는 칼리를 사용하는 것이 자유이지만 성장중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칼리를 의무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쟁점으로 여러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본인의 일화를 바탕으로 이를 풀어내고 있다.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정확한 인용은 생각나지만 대략 이러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칼리를 통해서 추하고 아름답지 않은 대상에 대한 responsibility를 갖출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더이상 아름다움이라는 요소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공평하고 사람의 인격의 참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진정한 배려와 사려깊음은 칼리를 껐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이는 외모적 요소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연히도 외모에 대해서도 이러한 요소를 느낄 수 있고 (너무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 외형이나 추함에 대해서는 우리는 불문율처럼 이를 언급하기를 꺼리고 생리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지식의 부재(너무 무식하거나), 또는 자기 과시(으스대거나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과도한 개인주의적 이기심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것을 예의와 예절이라고 생각한다. 칼리를 확장하여 내가 싫어하는 부분의 성격을 보이지 않도록 하는 필터를 끼고 산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세계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방식이라 할 수 있을까? 부정 피드백적인 요소를 통해 학습한다는 시스템적인 요소를 제외하고도 우리는 스스로와 타자간의 괴리를 어느정도 수용할 수 있는 tolerance를 가지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