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을 가는 비행기 안에서 완독했다.
양을 쫓는 모험은 댄스-댄스-댄스 까지 이어지는 쥐 4부작 중 3번째 책이다. 노마신인상을 수상한 하루키의 초기작으로, 여전히 작중 등장하는 요소와 실재적 의미를 결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나름대로의 울림이 있는 책이었다.
작중 등장하는 ‘양’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양이라는 이름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우고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양’의 특질과 구체적인 세부사항을 열거해 보자. 먼저 양은 실체가 있거나 그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자신이 동업하는 광고 회사에서 ‘쥐’에게 받은 홋카이도의 양떼 목장 사진을 광고 삽화로 이용하게 되면서 본의치 않게 양을 쫓는 모험에 동참하게 되었다. 양의 실체를 파악한 쥐의 의도가 담기기는 했다만은, 어찌 되었든 사진에 묘사된 양은 일반적인 양과는 다른 털 색을 가지고 별모양을 띈 일종의 환상적이고 신수적인 면모를 띄고 있다. 이러한 양의 외형은 일반적인 양과의 구분을 위한 것이지 양이 상징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별, star 는 주로 우리가 언제나 바라고 가지기를 열망하지만 아스라이 손에 닿지 않는 목표나 대상으로 사용되는 소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염원과 바라는 바 혹은 열망을 상징한다고 미루어 생각해볼 수 있겠다.
양은 실체를 가지지 않고 어떤 한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을 조종하며 사회 저변을 은밀하게 지배하고 교조한다. 양이 몸 속에 들어간 사람은 그 경험을 황홀해 하고 양의 조종에 순응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양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을 숙주처럼 이용할 뿐 쓰임새가 다하면 가차없이 빠져나간다. 양이 몸에서 빠져나간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잃은 듯 방황하다 폐인이 되고 만다. 주인공이 그의 여자친구와 묵었던 ‘돌고래 호텔’에서 만난 경영인의 아버지가 정확히 그런 인물의 예시가 된다. 자신이 외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양을 이동시키는데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호텔 방에서 평생을 틀어박혀 양에 대한 정보만을 광적으로 수집할 뿐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썩어간다.
주인공에게 게재된 광고를 삭제하고 양을 찾아주기를 의뢰했던 일본 우익의 거물 또한 양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뇌종양을 달고서도 양이 몸속에 들어와 있었기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기간동안 일본의 모든 정치,경제, 사회문화 전반에 쥐도 새도 모르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위세를 떨칠 수 있었지만, 그의 명이 다해가자 (명이 다해가서인지 그의 몸에서 달성할 만한 목적을 모두 달성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양은 잠든 사이에 그의 몸을 빠져나갔고, 그 즉시 혼수상태에 빠져 절체절명의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로 인해 거물의 비서가 양을 찾아달라는 목적으로 주인공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비서도 순수한 목적으로 양을 찾아 자신의 주인을 복권시키기 위해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양이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지켜봤을 것이고 그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야망에 주인공을 부추겨 양을 찾도록 지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애초에 양을 주인공에게로 끌어들인 ‘쥐’의 계획으로 무산되고 만다. 평생을 자신의 인생의 이유를 비관하고, 과거 주인공과 술집에서 살았던 호시절만을 추억하며 살았던 쓸모없음의 인물이었던 ‘쥐’는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믿을 수 있는 상대였던 주인공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그를 끌어들여 ‘양’을 죽인다는 은밀하고 위대한 계획을 성공해 낸다. 계획을 성공하고 유령이 된 쥐와 ‘나’가 서로 등을 맞대고 어두운 방안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을 읽자 하니 양을 잡아 통쾌하고 기쁘기 보다는 ‘쥐’와 ‘나’가 애잔하고 안쓰럽기까지 하다.
책을 빠르게 읽은 것도 있고 읽고 독후감을 쓰기까지의 텀이 조금 있어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줄거리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알기 위해 인터넷에 올라온 다른 독후감을 참고해 보았다. ‘인간의 탐욕’,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농축된 이데올로기의 근원’, ‘관념만 남은, 그래서 형체가 필요한 악의 실체’라는 일차적인 해석과 함께 양이라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악마’와 대치되는 소재를 결부시켰다는 해석을 찾아볼 수 있었다. 여기에 입각해 바라보았을 때 ‘쥐’는 자신에게 스며든 양에 복종하고 빌붙음으로 자신의 권력과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양에게 반항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 양을 세상에서 없애버린 일종의 성자나 예수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물론 나의 의견은 이와 다르다. 분명 악마와 대치되는 양의 소재를 사용한 것이 앞서 언급한 이유와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쥐’가 양에게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쥐’는 자신의 욕망과 목표, 삶에 대한 의지와 이기심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하루키의 ‘쥐’ 이야기에서 보여왔던 삶에 대한 쥐의 태도는 서리가 앉은 가을 아침처럼 쓸쓸하고 서글펐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루키는 쥐를 악에 대항하고 정면으로 맞선 구세주이자 영웅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마치 허무주의적이고 비관 속에서 살아가며 삶에 대한 의지와 쓰임새 없이 살았던 존재인 ‘쥐’가 양을 잡았다는 사실을 통해 주도적이고 목표지향적인 삶과 가치관에 대한 역설을 의도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소설 속 삶에 가치를 굳이 매겨본다면, 자신의 삶과 존재에 참을 수 없는 가벼운 가치를 두었던 쥐의 삶이 가장 가치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비서’에게 이용당하고 쥐의 계획에 얼떨결에 동조하며 한사코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나’ 또한 결국 쥐의 큰 계획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소설의 제목인 ‘양을 쫓는 모험’은 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용당해 왔지만 그럼에도 그 닿지 않는 별을 향해 무의미한 발걸음을 떼고 실행에 옮겼던 주인공의 일대기를 지칭하고 있다.
이제 와서 다시 통찰해 보면 양이 무엇을 상징하고 어떠한 요소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양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양을 쫓는 모험의 궤도에 오른 ‘나’와 ‘쥐’, 그 속에서 깨닫게 되는 인간 실존의 허무와 의미론의 부재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양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 속에 양이 들어오기만을 한사코 기다리는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양에 대해 얼마나 대비하고 있는가. 양이 들어왔을 때 지배당하지 않고 결연한 의지로 양을 처단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가, 아니면 그저 실체도 없는 관념적인 허상을 좇아 누구보다도 의미있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의미가 가벼운 존재인 쥐만도 못한 삶을 구가하고 있는가.
블로그에다가는 쓰지 못했던 조금 더 생각해봤던 점이 있다면, 악, 욕망에 사람의 인격을 부여하였다는 부분에 대해 더 생각을 해봤던 것 같다. 그 저의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만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하나만은 명확하다. 이런 맥락에서 양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행복’, 혹은 행복을 실현시킬 수 있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행복은 가치 중립적이다. 누군가의 행복은 누군가에게 비참함이고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사회 체제도, 기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모순적이고 만약 존재한다 하여도 그 세상에서 존재의 의미는 무가치해지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