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읽어보기를 추천하는 단편 목록

  •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나머지도 다 재밌지만 ‘숨’과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정말 최고명작임에 틀림없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한 일화에서의 주인공 이름이 핫산이라서 좀 웃겼다.

어떤 정보를 감추는 것은 그것을 밝히는 것만큼이나 쓸모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산은 깨달았습니다. “아뇨, 오히려 경고해주지 않아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20년의 시간의 차이를 둔 연금술사의 문을 두고 일어나는 여러 일화들을 왕에게 고하는 단편 속에 일화집의 형태로 저술되어 있다. 책에서는 할아버지의 역설 등을 언급하며 시간여행이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하기보다 마치 이솝우화에서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각각 어떻게 연금술사의 문을 이용했는지를 유비로 알려주고있는 듯 하다.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테드창의 천재성을 알 수 있는 단편. 엔트로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이야기는 마치 근대 영국의 중앙 제어식 시계 시스템을 필두로 한 스팀펑크 세계관에 발을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류처럼 유기체가 아닌 금속 피부와 유압으로 된 인류 또한 숨을 통해 공기를 교환하여 작동한다.

완벽할 것만 같은 세계에서 포고문을 낭독하는 사람과 시계의 오차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해부학자인 주인공은 미지의 영역인 뇌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거울을 잠망경처럼 만들어 스스로의 뇌를 해부하고 관찰하는 실험을 거행한다. 그는 스스로의 뇌를 해부함으로써 뇌 속에 들어있는 금속 박에 정보를 기록하고 읽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뇌로 공급되는 공기 자체가 기억의 매체이며 금박은 빠르게 파이프 혹은 배관과 같이 유동하며 기록과 삭제를 고속으로 수행하는 매개체였던 것이다.

공기는 사실상 우리의 사고가 각인되는 바로 그 매체였다.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공기 흐름의 패턴이었다. 나의 기억은 박편에 팬 홈이나 개폐기의 위치가 아니라, 지속적인 아르곤의 흐름으로서 각인되는 것이다.

금박 조각들은 모두 격자에 매달린 상태로 되돌아가면서 그것들이 표현하던 패턴과 의식을 지워 버린다. 공기를 다시 보급해도 이미 소실된 패턴을 다시 만들어낼 수 없다. 이것은 어찌 보면 속도를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라고도 할 수 있다. 패턴을 저장하기 위해 좀더 안정적인 매체를 쓴다면 우리의 의식은 지금보다 훨씬 느리게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기신호를 의식전달의 매체로 사용하는 인간의 뇌와 비교해 보았을 때 유압으로 작동하는 뇌는 어떠한 형태일지, 실제로 작동할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했고 의식과 기억의 매개체를 정확히 특정하여 그 특징을 적절히 비유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해부학자는 탑 시계가 빨라진 것이 아니라 공기의 흐름이 느려짐에 의해 뇌의 작동이 느려지고 있음을 통찰했다. 자기자신에 대한 인식, 3D 프린터로 3D 프린터를 만들고, 만들어진 컴퓨터로 자기 자신을 설계하고, 작동중인 스스로의 뇌를 바라보며 통찰하는 일종의 재귀적 모티프가 만들어내는 통찰은 유니크하다. 어쩌면 분열과 생식 또한 자기자신의 유사 복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재귀적 과정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자신의 뒤통수를 조준하는 화살과 동일한 유비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생명 원천은 기압 차이이다.

나는 이 우주의 압력 평형화에 기여하고 있다. 생각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치명적인 평형 상태의 도래를 촉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의 덧없는 길이와 엔트로피 증가로 인한 효과를 절감하기 위한 최소 시간이 아득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우리는 엔트로피 증가를 단지 과학적인 현상이자 자연의 법칙으로 인지하지만 기압차이를 체감하는 인류에게는 엔트로피의 증가와 우주적 종말이 우리에게 ‘지구 온난화와 환경문제’ 보다도 크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단락의 대목이 인상깊었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다양한 양태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주인공의 독백으로 넘어갈 것이 아니라 우주와 세상을 바라보는 테드창의 관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결정론과 필연성이 아닌 우연성과 가능성에 의한 의미가 생긴 우주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해야 할 일

Negative time delay가 세상에 존재할 때의 세계선, 세상은 무동무언증이 퍼져버렸으며 마치 인지적 역병이라도 되는 것 처럼 번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형언할 수 없는 러브크래프트적인 공포라든지, 인간의 논리 체계를 망가뜨리는 괴델식 문장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모든 유형의 움직임과 사고와 행동은 결정론과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떤 동역학계는 수렴 영역으로 빠져들어 고정점에 머무는 데 비해, 어떤 동역학계는 카오스적 양태를 무한정으로 지속한다. 그럼에도 이 두 시스템은 전적으로 결정론적이다.

김초엽 작가의 ‘양면의 조개껍대기’에 등장하는 단편에서의 사고관과 유사하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 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이 현실인지는 주용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이며, 이 거짓말을 믿는 것이야말로 꺠어 있는 혼수 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했던 ‘테넷’의 세계관에서 주인공과 주변 사람들이 가졌던 신념과 유사하다. 과연 우리는 호접지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까, SF 스럽게 말하자면, 통속의 뇌인 것인가. 무언무동증에 빠져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과 환상 속에서도 실존의 의의를 찾아가며 살아가는 사람들까지도 결정론에 따르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소프트웨어 상의 생물인 ‘디지언트’의 개발자와 그들을 진정으로 생물 혹은 반려동물로 생각하고 키우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테드 창이 써내려간 이 중단편에서 그가 주장하는 바는 확고하다. 우리가 인간에 대한 실존에 대해 확신하고 있지 못하지만, 동물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동물과 인간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동물과 인간이 ‘비’성적 유대 관계를 가지는 것에는 모두가 온건한 시선을 보이지만, 성적인 관계는 왜 그럴 수 없을까.

동물은, 더 나아가 AI는 법인이 될 수 있는가.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별로 임팩트 있지 않았어.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한 개인의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고 녹화하여 영상 아카이브를 검색가능하도록 보관하고 recall하도록 만드는 리멤(Remem)이라는 기술이 상용화된 세계에 관한 이야기. 인간이라는 존재의 확장은 어디까지인가. 단적인 예시로 우리는 타인의 전화번호를 저장하고는 ‘너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어’ 라고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기억하는 것은 상대방의 전화번호가 내 핸드폰에 저장되었다는 사실을 알 뿐 실제로 전화번호는 기억하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디지털 시대를 누리며 살아가는 많은 부분들은 인간 수족의 연장이자 뇌의 확장된 형태이다. 단단한 것을 깨지 못하는 연약하고 무른 인간의 손의 연장으로 망치와 같은 공구를 발명하였고,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인류에게 문자를 통해 기억과 대화를 새로운 지평으로 끌고 간다. 인지적 영역까지 포함하여 우리는 한 개인을 정확히 내부와 외부로 구분지을 수 없다. 리멤은 여러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조차 개인의 연장선에서 공유된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 하다.

바로 이 지점부터 진실의 추구는 그 본질적 선함을 잃게 된다. (중략) 테크놀로지가 나쁜 버릇을 조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주인공은 기억의 개인성을 파괴하는 리멤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항상 좋은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들어 리멤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주장한다.

한편, 아프리카 서부의 원주민들이 사는 구역에는 한 유럽인 선교사가 파송되었는데, 모스비라는 원주민 아이에게 선교사는 글쓰는 법과 서양의 문명을 알려준다.

무언가 잘못 기억한다는 행위 자체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해지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오류 정정 시스템을 갖춘 실리콘 조각에 저장된 디지털 동영상들은, 오류투성이였던 우리의 측두엽들이 과거에 수행했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할 것이다.

용서의 전제 조건인 기억의 연화를 원천 봉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식의 주체가 뇌 속임을 알면서도 그 뇌를 길들이지 못해 안달이다. 무언가 기억하게 하기 위해 학습시키는, 익숙해지는 과정을 억지로 뇌에 부하를 걸어가며 학습시키고, 잊어버리라는 명령은 그 명령 자체로 자기 배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은 기억의 풍화와 무의식적 조작을 통해 연화되는 과정이 용서의 전제라고 피력한다. 일부분 동의한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던 일을 용서하려면, 적어도 맞을 때의 공포와 서러움에 대한 망각이 어느정도는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편, 선교사로부터 글을 쓰는 연습을 계속 했던 원주민 아이 지징기는 본인이 인식없이 사용하던 말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말을 부호화하는 글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파롤과 에크리튀르의 차이와 그 혼재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글은 글 스스로도 의미가 있지만 말을 결정화하고 조직화하는 기능또한 존재함을 깨달았다.

모스비에게 중요한 것은 글이었다. 모스비가 설교를 미리 써놓는 것은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특별한 단어 배열’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징기는 꺠달았다. 일단 자기가 원하는 배열을 찾아내면, 필요한 내내 그것으 고수할 수 있기 떄문이다.

글이란 단지 누군가가 한 말을 기록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다. 글은 입 밖으로 내서 말을 하기 전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단어들 또한 단순한 말 조각이 아니었다. 단어들은 생각의 조각이었다. 그것들을 옮겨 적으면 생각을 벽돌처럼 잡고 다른 배열들 속에 끼워넣을 수 있었다. 글쓰기는단지 말을 하는 것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스스로의 생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일단 보고 나면, 그것들을 개선시켜 더 강하고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야기는 점점 종반부로 치닿고 독립적이었던 ‘리멤’에 대한 이야기와 말과 글을 배우는 원주민의 이야기는 하나의 결론의 커다란 강의 하류로 합쳐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일화 기억을 우리 정체성의 필수 요소로 여기는 탓에, 그것을 표면화함으로써 책장의 책이나 컴퓨터 파일과 같은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을 꺼리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감각기관을 통해 수용하는 감각을 기억으로 부호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멋대로 해석하고 변형한다. 없는 사물을 착시로 상상하여 생성하는 뇌의 매커니즘만 보아도 우리 뇌가 얼마나 일상적이고 개연성 있는 스토리를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에 능한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의 기억은 사적인 자서전의 집합이며, …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만약 모든 사람이 모든 사건을 기억한다면, 개개인 사이의 차이 또한 깎여나가게 될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자아상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방범 카메라가 기록한 무편집 영상이 영화가 될 수 없듯이, 완벽한 기억이 절로 이야기가 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개개인은 공통된 세상이라는 환경의 1인칭 관찰자로써 감정과 감각을 적절히 배합하고 조율하여 네러티브를 만들어내는 미니 각본가이자 감독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수많은 범죄자들이 자신의 범죄 현장을 촬영한 CCTV를 보고도, 여전히 자신의 무의식 중에 그랬다거니, 그런 기억이 없다고 발뺌하는 것을 통해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성을 가진 영상이 우리의 세계를 관찰자로 뒤덮은 1984의 세계를 사는 현재라고 해서 인간 고유의 스토리텔러적 특성을 해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말 아프리카 서부 지역에서의 그렇게 통칭되는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우리 언어에는 당신 언어의 ‘사실’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언어가 두 개 있습니다. 어떤 일이 옳을 떄는 ‘미미’라고 하고, 정확할 때는 ‘보우’라고 합니다.

그가 부족간의 분쟁이 일어났을 때 서기관의 역할로 회의에 참석하게 되고 자신의 부족이 실제로 사실이 아닌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부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가치판단이 포함되고 함의된 ‘옳은 거짓’ 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글쓰기는 테크놀로지다. 따라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의 사고 과정에는 테크놀로지가 매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인지적 사이보그가 되며, 그 사실은 우리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유형의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에게 있어 도구 또한 신체의 연장선이지만 인지적인 도구인 글쓰기와, 여러 비판적 사고과정과 툴(철학을 비롯한)을 장착한 인간 또한 인지적 사이보그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과거에 대한 기록이 마땅히 불변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글을 쓰는 문화가 글에 대해 느끼는 외경심의 산물이다. 인류학자들은 구전에 의존하는 문화는 과거를 다르게 이해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문화의 경우, 역사적 사실의 정확성은 해당 공동체의 자기 이해를 입증하는 행위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를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그들의 역사는 해야 할 일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과 명제, 논증과 추론은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현대의 산물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을 수식으로 증명할 수 없듯이 발화자에 따라 첨삭되고 조율을 거쳐온 테세우스의 배와 같은 구전 문화 또한 현대인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온도계로 부피를 측정하는 것 만큼이나 뜬구름잡는 방법이다.

현대의 개개인은 사적인 구전 문화이다. (중략) 문자 문화가 구전 문화가 낫다고 주장하기야 쉽지만, 이 이야기를 말로 전하는 대신 글로 쓰고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내 의견은 분명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다. 그러므로 내 입장에서는 우리가 글을 얻기 위해 치른 대가를 인식하는 것보다는 그 혜택의 진가를 인정하는 편이 쉬웠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중략) 문서 기록 또한 온갖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 해석 또한 변하기 마련이지만 적어도 기록된 글은 바뀌지 않고 남으며 그 사실만으로 진정한 가치가 있다.

헌신적이고 자녀를 위하는 부모라고 생각했던 주인공은 리멤의 기록을 보고 나서야 그러한 숭고한 희생으로 보이는 것들이 모두 자신이 올바른 부모라는 명제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된 기억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미화된 기억과 무의식속에서의 위선을 통해 스스로를 포장하고, 변호하고, 나는 보기보다 착한 사람이라는 거짓 명제를 만들어 자아를 안심시키는 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리멤이 지배한 극단적 사실에 입각한 사회는 아니지만, 여전히 사실과 가치판단이 구분되지 않는 구전사회보다는 리멤 쪽에 가깝다. 두 극단의 사회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인지적 사이보그(혹은 확장된 형태의 수족)으로부터 스스로의 기억과 정체성의 오류를 검증받고 심문받는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성을 잃지 않는 이상, 스스로의 자아를 유지하려는 (일관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이상 개인의 신화와 구전 설화를 만들어내는 인류의 특성은 유지될 것 같다.

거대한 침묵

에스퍼레이션(Aspiration)이라는 단어에 ‘염원’과 ‘숨을 뱉는 행위’ 양쪽의 뜻이 모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을 할 때 우리는 폐의 숨을 이용해, 우리의 생각에 물리적인 형태를 부여한다. 우리가 내는 소리는 우리의 의도인 동시에 우리의 생명력이다.

외우주에 대한 탐험을 통해 외계 지성과의 접촉을 꾀하는 인류를, 스스로의 신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었던 멸종위기에 놓인 푸에르토리코 앵무의 입장에서 바라본 초단편이다.

옴팔로스

창조론의 물적 증거가 발견된 세계에서 과학자는 어떤 사명을 가져야 할까?

“과학은 진리의 탐구만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과학은 의도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줄곧 진리와 의도가 동일한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과학은 어떠한 철학을 견지해야 할까? 유물론? 의미론? 세상을 이루는 공식과 법칙들은 순수하고 완전무결해서, 선이나 악의 흔적을 그 속에서 발견해내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우리 인간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떻게’라는 질문의 해답을 계속 탐구하겠습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프리즘을 통해 다중우주에 접속할 수 있다면. 프리즘을 작동하는 순간 마치 슬릿에서 전자가 위로 갔는지 아래로 갔는지 관측하는 행위를 통해 경로를 확정하는 것 처럼, 위로 간 세계와 아래로 간 세계선은 그 시각을 기점으로 분기하게 된다. 카오스 이론에 의해 처음에는 원자나 분자 단위의 작은 변화가 기상과 기후의 변화로, 점차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분기하게 된다. 그렇게 각 세계는 독립적이고 이질적인(비가역적) 분기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프리즘에 할당된 용량만큼 정보를 반대쪽 세계로 보낼 수 있다. 이렇게 인류는 수많은 프리즘을 만들어 수많은 다중우주를 살아가게 되었고, 각 세계 간의 정보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일이 가능해졌다. 평행 자아가 주는 정보를 이용해 한쪽 세계에서의 범죄를 성사시키기도, 사업과 연애에 실패한 본인과는 달리 모든 것에 성공한 자기자신과 대화하며 스스로에게 (평행 세계의 자기 자신은 타인인가?)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들은 프리즘을 이용하여 평행 세계로부터 이득과 이윤을 취하려 했지만,

모든 갈래의 세계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실험재료가 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과연 평행우주를 분기시킬 수 있는 프리즘이 발명된다면 범죄율은 어떠한 경향성을 보일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이 무의미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그들이 취하는 모든 행동이 그들이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평행우주의 존재에 의해 상쇄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인간의 의사 결정은 양자적 현상이라기보다는 고전역학적 현상임을 지적했고, 따라서 선택한다는 행위 자체가 우주를 새로운 갈래들로 분기시키지는 않는다고 설명헀다. 새로운 갈래의 평행우주를 형성하는 것은 양자 현상이고, 각 갈래에서의 개인의 선택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다는 뜻이었다. (중략)

에드거 엘런 포는 단순히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경향을 ‘비뚤어진 임프’ 라고 표현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심술궂은 악마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어떠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건이 일어남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니까, 프리즘이 보편화된 이래 우리가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모습을 보고 있다고 해서, 그게 우리가 총을 집어 드는 세계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어.

우리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당신은 다음번에도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는겁니다. 그건 의미가 있는 일이지요.

테드 창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평행우주론을 작금의 현실세계에 바로 대입해보아도, 위 논제가 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어떠한 가능세계라도 존재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고전 역학적인 존재로 스스로에게 수용되어지는 감각을 부호화하여 차곡차곡 포개고 주관적 인지를 형성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말을 인용하며 그의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뒷받침한다.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 해석은 우리의 우주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다른 버전의 평행우주들로 끊임없이 분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나는 불가지론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이 해석의 지지자들이 그것이 시사하는 바에 대해 지금보다 조금 덜 과격한 주장을 펼친다면 그들이 받는 저항 역시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이 해석이 우리가 내리는 결정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당신이 무슨 선택을 하든 간에, 그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 다른 우주가 언제나 존재하므로 그 선택의 윤리적 무게는 무효화된다는 논리다.”

설령 다세계 해석이 옳다고 해도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이 그런 식으로 상쇄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어떤 개인의 성격이 그가 지금까지 해온 선택들에 의해 밝혀지는 것이라면, 그와 비슷하게 그 개인의 성격은 그가 여러 세계에서 해운 선택들에 의해 밝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에게 여러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여러 명의 마르틴 루터들을 조사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교회의 권위에 거역하지 않은 루터를 찾기 위해서는 아주 멀리 떨어진 세계까지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주는 척도기도 하다.

인간을 결정하는 근본적 요소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주장이 있지만 현재의 인간을 만드는 것은 우연적인 양자적 관측과 분기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가 만들어낸 선택과 판단의 연속임에 분병하다. 마치 A priori, 사후관찰을 하는 것 처럼, 평행세계와 우주론이 맞다고 가정하여도 그것은 한 개인의 도덕성과 윤리관과 대립되지 않는다.

거시 세계와 양자 세계 사이의 애매한 크기의 영역들처럼 테드창의 소설은 인류과학의 진보와 아직 밝혀진 것이 적고 미성숙한 인간 윤리와 도덕성의 잣대 사이의 회색지대를 교묘하게 파고든다. 그의 인포덤프(info-dump) 식 하드 SF는 신선하고 독창적이었으며,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