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독서에 빠져있을 때가 있었다.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만나본(적어도 인류애적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의 어떤 한 시점에서 혹은 지금도 계속되는 습관으로 독서에 굉장히 매료된 적이 있는 것 같다. 그 당시에 나는 그랬고 서가에 꽂힌 두꺼운 책에 관심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지 오웰의 ‘1984’를 오마주한 책인지도 모르고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고전문학의 책장으로 가서 먼저 1984를 읽었을 것 같지는 않다. 심지어 1984도 개별적으로 읽긴 했을 것이다만) ‘1Q84’를 먼저 보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겉핥기 식으로만 읽었던 과거의 나 자신을 고려하여도 정말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대충 읽었나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공기 번데기’ 라는 꽤나 각인되는 책의 이름도, 당시로써는 꽤나 파격적이었을 법한 정사 장면도(사실 이건 얼핏 기억이 나긴 했다.) 마치 처음 읽는 것 처럼 새롭게 느껴졌다. 당시에 책은 읽은 기억으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는 유일한 기억은 남자 주인공인 ‘덴고’의 이름과 여자 주인공인 ‘아오마메’가 청부살인업자라는 사실, 그리고 뭔가 이상한 사이비 종교단체의 수장 정도였다.

1권

줄거리를 설명할 것이 아니기에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 장면이나 신선한 소재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하루키의 책에서는 꼭 한 장편당 하나의 음악을 테마로 하는데 이번에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였다. 평행선을 달리는 두 이야기를 이어주는 가교적 요소가 되기도 하고 딱딱한 메일에 첨부파일 이미지로 설명하듯 책으로만 전달할 수 없는 요소들을 독자로 하여금 직접 찾아 듣도록 만든 작가의 고심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조금 찾아 본 결과로는 신포니에타의 처음과 끝이 같은 선율을 갖는 수미상관의 구조가 작중 처음과 끝의 장소가 동일한(한번 읽었다지만 이건 스포당했다) 점과 유사성이 있어 그 부분에서 하루키가 이 음악을 선정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있다.

  • 체호프의 사할린 섬

얀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이라는 책은 작중 후카에리가 덴고의 집에 방문하였을 때 그가 후카에리에게 읽어주었던 책이다. 체호프의 말년에 사할린 섬이라는, 일종의 종말적이고 국가의 깊숙한 치부 같은 곳을 탐방하며 쓴 견문록에 가까운 글이다. 글의 묘사는 감정적이거나 모호한 표현이 아닌 정경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방법으로 사할린 섬의 생태를 묘사했다. 같은 작가의 저서인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볼 수 있듯 풍경에 대한 세심하고 적확한 묘사는 때로는 감상적이고 두루뭉술한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 보다 읽는 이의 마음을 더욱 울릴 수도 있는 것 같다.

  • 하루키의 사회 참여

같은 대목이 또 있었던 것 같지만은 주제부터가 ‘선구’라는 사이비 단체를 적의를 가진 악역으로 보고 진행되는 스토리이므로, 일본의 특정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작중 체호프의 총(2권에서 나온 소재이지만)을 실제로 등장시킨 하루키의 의도로 보았을 때 호위무사 역인 ‘다마루’가 게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적이거나 즉흥적 요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람하고 육중하며 빈 틈이 없어보이는 경호역을 맡는 다마루의 사적인 측면이 그렇다는 사실이 난 오히려 차별적으로 느껴지기는 했지만.

2권

무엇이 선과 악인지, 청부살인업자인 아오마메가 선이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리틀 피플의 대리인으로 미성년자에게 해서는 안될 일을 하는 ‘선구’의 리더가 악인지 알 수 없다. 아니,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 경계를 이루는 것 자체가 선이다.

덴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데 지쳤어요.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데도 지쳤습니다. 나는 친구가 없어요. 단 한 사람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해요. 왜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가. 그건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그런 행위를 통해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거예요. 내가 하는 말, 알아들어요?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는 없어요. 아니, 그게 아버지 탓이라는 게 아니에요.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역시 그런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죠. 아버지도 아마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잘 몰랐을 거예요. 안 그래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백이 생기면 누군가가 와서 채워야 해요. 다들 그렇게 하는 거니까.”

“다들 그렇게 한다고요?”

“그렇고 말고요.” 아버지는 단언했다.

“아버지는 어떤 공백을 채우고 있죠?”

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긴 눈썹이 처져서 눈을 가렸다. 그리고 약간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그걸 모르는군요.”

“모르겠어요.” 덴고는 말했다.

치매로 요양원에 들어갔던, 어린 시절 자신이 단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덴고’의 재회 장면 중.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해요.” 그녀는 말했다.

긴 팔이 어디에선가 뻗쳐오고 있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지상 최강의 남녀 듀오니까.

비트는 멈추지 않는다. Beat goes on.

덴고와 후카에리는 지상 최강의 남녀 듀오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실증 가능한 진실 따위는 원하지 않아. 진실이란 대개의 경우, 자네가 말했듯이 강한 아픔이 따르는 것이야.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은 아픔이 따르는 진실 따윈 원치 않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자신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의미 있게 느끼게 해주는 아름답고 기분 좋은 이야기야. 그러니 종교가 성립되는 거지.”

“사랑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건가?” 남자는 물었다.

“그렇습니다.”

“자네가 말하는 그 사랑이란 누군가 특정한 개인을 대상으로 한 것인가?”

“그래요.” 아오마메는 말했다. “구체적인 한 남자를 향한 것이에요.”

“힘없고 왜소한 육체와, 이울어짐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라……”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잠시 틈을 두었다. “아무래도 자네는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군.”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왜냐하면 자네의 그런 모습 자체가 말하자면 종교 그 자체이기 때문이야.”

(중략)

“맞아. 자네는 분명한 의지에 이끌려 목적을 품고 이곳에 왔어. 여기 이 1Q84년의 세계에. 자네와 덴고가 어떤 형태로든 이 곳에서 서로 관련을 갖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야.”

“그건 어떤 의지이고 어떤 목적이에요?”

“그걸 설명하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남자는 말했다. “미안하네만.”

“어째서 설명을 못하죠?”

“의미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언어로 설명되는 순간에 상실되고 마는 의미도 있어.”

(중략)

“상관없어요.”

“자네에게는 사랑이 있으니까.”

아오마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은 싸구려 연극일 뿐이다.” 남자는 말했다. “노래 가사하고 똑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