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이응 (김멜라)
이걸 쓴 사람보다, 평론가가 더 통탄스러웠다. 성에 대한 개방성, 자유성으로 누구나 편의점에서 성욕을 해소할 수 있게 된다는 가정. 이러한 가정부터가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 전개로부터 도출되어지는 결론이라던지, 생각의 방식이 너무 편협하고 특정 사상에 편중되어있음이 느껴져 좋게 느끼기가 어려웠다. 사랑과 성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한 것, 성적 욕구를 불시에 찾아오는 제어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욕구로 치부하며, 안기 로 대표되는 인간과 인간간의 상호작용에서 찾아오는 사랑과 분리시킨다. 모쪼록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텐데 (공현진)
주인공은 매력이 있는듯. 남주 여주 둘 다. 결국 소멸과 멸망이라는 컨셉트를 가지고 두 개인의 공통적인 사건을 계기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 같은데, 무엇을 의도하는 건지(교훈성)의 측면에서는 모호한 것 같다.
보편 교양 (김기태)
작가가 책을 좀 읽었나? 즐겁게 읽었다. 앞선 작품들의 선택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보니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등장하자 자본론때문에 선정된건 아니겠지? 싶기도 했고 의구심이 들었다. 요새는 어떤지 모르곘으나 일종의 금서로 취급받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역시도 학문적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알아볼 필요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서워서 읽는다고 말은 못하곘다만, 역으로 이걸 공부한다고 팠다가 무서운 사람들을 만날까봐 두려운 것도 있는 것 같다.
파주 (김남주)
가끔은 철저히 자신이 지은 죄와 잘못을 문책당하고, 잘못을 고해지고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파주에서 군생활을 했던 정호는 후임인 현철에게 괴롭힘과 폭력을 행사하였다. 3년이 지난 후 나타난 현철은 앞으로 1년간 매달 100만원씩 송금하지 않으면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 사실을 폭로하겠다며 협박한다. 사건의 관찰자이자 정호의 동거인인 윤정은 처음에는 정호가 그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에 대한 궁금함으로, 나중에는 현철에 대한 묘한 동질감과 정호에 대한 혐오감으로 그를 둘러싼 사건을 서술한다. 현철도 정호도 군생활 시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현철은 독자로 하여금 정호라는 인간에 스스로를 대입시키고, 죄를 문책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캐릭터이다. 무엇을 하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찔림과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이 있지는 않은가. 타인에게 끼친 상처와 무책임함이 스스로를 문책하고 옥죄일 때 한달에 백만원이라는 양심비용은 얼마나 구원과 같이 다가올까? 순박하고 착해빠져 보이는 청년인 현철이 정말로 불쌍하게 느껴진 이유는, 스스로는 괴롭힘 당하고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복수랍시고 용기낸 그 일이, 정호에게는 도리어 그 당시의 죄책감에 대한 책임을 금전에 전가함으로 더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착해빠진 현철은 타인을 괴롭게 하고 복수하는 일에도 능하지 못하여 도리어 해방의 기간을 주고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현철을 자유롭게 했다는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었다.
생각하는 대로 글이 잘 안써졌는데, 아무튼 다시 이글을 봤을 때 이해할 수 있기를
반려빚 (김지연)
철저한 자본주의의 언어로 쓰인 절절한 사랑 이야기. 세상 모든 것에 가격표가 붙을 때 누군가에게 느끼는 ‘부채심’또한 가격표를 붙일 수 있을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했던 주인공은 다시 나타난 남자를 보고도 그에게 족쇄를 감긴 채 살아가고 싶은 열망을 느낀다.
반려빚을 산책시키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반려빚이 주인공을 산책시키는 행위는, 사랑을 채무의 형태로 감내한 주인공 스스로를 상징한다.
혼모노 (성해나)
혼신을 다한 가짜(니세모노)는 혼모노를 이긴다. 어쩔 수가 없다 영화의 서사를 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주술적이고 영험한 영역에 있는 박수무당이라 할지라도 결국 자본논리 앞에서 경쟁과 피튀기는 진흙탕 싸움 속에 발을 들여놔야 한다.
그들이 모시는 할머니 신은 인간들을 장난으로 조종하고, 툭툭 건들이면서 괴롭히는, 학창 시절 개미를 가지고 노는 순수 악의 신인 것 같다.
무엇이 혼모노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결국 우리가 응원하는 대상은 어린 신애기가 아닌, 가짜 작두를 타고 유튜브에서 신내림 연기를 보고 따라했던 신에게 버림받았던 주인공이었다. 결국 진짜가 아니더라도 죽을 힘을 다해 연기한 것은 사람들에게 먹혔고, 역설적으로 진짜 재능이 아닌 자아의 강렬한 의지와 세계의 합일로 인해 성공했다는 내용을 전한다. 우리 세상에는 타고난 재능과 실력이 아닌 처연하고 절절한 가짜의 연기만으로 정상의 자리에 오른 인물들이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능력을 인정받고 세상가운데 알려질 떄, 비로소 가짜는 가짜의 타이틀을 벗고 혼모노라는 새로운 영광의 칭호를 얻게되는 것 아닐까.
언캐니 밸리 (전지영)
불쾌한 골짜기라는 이름답게, 기생충 영화가 생각났다. (아직 보지는 않았다.) ‘장애’가 있는 ‘남성’이 수상한 약을 거래하는 ‘젊음’을 가진 ‘여성’을 스토킹하는, 정말 불쾌한 골짜기의 말단에 위치한 내용이지만, 그 둘은 묘하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청하동 언덕 위의 노부인이 사는 집은 명백히 사회의 부조리와 구조적 모순을 상징한다. 그 안에서 패배감과 무력감을 공유하는 그들은 서로 동질감을 느낀다. 모두가 그러면 안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역전이 불가능한, 거스를 수 없는 힘을 누구보다도 인지하고 있기에 자신의 윤리와 양심을 억누르고 그들은 침묵한다. 청하동에 올라가 자갈로 된 담장에 담뱃불을 눌러 끄는 주인공의 소소한 반항을, 노부인들은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 전혀 반항과 저항이 불가능한 압도적인 무력과 권력 앞에서, 사람들은 발버둥치기보다 굴종하고, 비굴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비련한 처지에 놓인 두 사람은 괴리와 혐오감과 동질감이라는 양가감정을 느끼며 가까워지지만, 주인공은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야 여성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타자에 대한 몰이해함을 자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