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온, 다정, 무해한 소설 같지만, 의외로 서사가 있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주인공이 희령에서 자신의 할머니를 조우하고, 할머니로부터 듣게 되는 끈끈한 옛 이야기들, 삼천이와 새비 아주머니, 대구의 명숙이 할머니, 총 4대에 걸친 이야기들을 주인공인 지연이 할머니의 찬장에 있는 낡은 편지를 읽어드리며, 또 할머니의 입을 통해서 전개된다.

남자들의 우애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여자들의 연대와 우정이니, 이런 이분법적인 비교를 떠나, 실화를 바탕으로 썼다 해도 믿을 만큼 생생한 고증과 이야기 구성, 실제로 있을 법한 주인공과 주변인물들로 인해 쉽게 이입되고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음.

뭐 독자들이 프레임을 씌워서 글을 읽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나는 이 이야기 자체가 남성을 악으로 규정하고 원자폭탄, 노동착취, 전쟁을 남성성의 상징으로 보고 악으로 묘사한다고 보지 않는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였던 수십년 전 과거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여성의 입장에서 이중혼을 한 남편, 자신을 평양에서 구해준 줄 알았지만 실은 가부장적이고 임신한 아내를 전혀 챙기지 않았던 증조모의 남편이 ‘남성’에 포커스를 두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기적이고 자신들의 편의대로 이용해먹는 증조모의 남편과 할머니의 남편(이름이 기억나지를 않는다)에서 어쩔 수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묘사하면서 주인공 지연의 비참한 상황과 오버랩하는 장면에서는 어느 정도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은 남자인 내가 읽었을 때도 그리 크게 ‘남성’으로 인해 억압받은 여성들간의 우애와 연대 서사 라고 단정짓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다.

자서전적이고 회고적인 담담한 묘사가 오히려 독자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느꼈다.

마음이란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씼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두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