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사랑
우리가 불쾌한 골짜기라 통칭하는, 이성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왠지모를 불쾌함을 가져다주는 그러한 소설이었다. 전신이 완파되는 사고를 당한 남자친구를 위해 그의 뇌를 자궁 속에 넣어 보관하게 된 주인공은 이성적으로는 뇌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들을 출산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지만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다.
“그러나 예속의 한 형태를 해체해 본 나는 그런 과정을 되풀이하는 일이 너무나도 쉽다고 느꼈다. 겉모습만 다를 뿐 동일한 종류의 속박을 간파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타성에 의해, 그리고 생체적 신호에 의해 적절한 사랑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쉽지만, 그 사랑의 표지들이 더이상은 물질적이거나 감정적인 것 이상의 무언가가 아니라, 최악의 최루성 신파 영화의 약삭빠른 수법 못지않게 무의미하고 우스꽝스럽다고 느낀다.
크리스란 크리스의 뇌지 그의 짜부라진 사지나, 박살난 뼈나, 손상으로 인해 출혈이 멎지 않는 내장이 아니다. 고통을 느낄 염려 없이 어차피 폐기될 예정인 육체의 잔해로부터 해방된 홀가분한 상태로, 깊고 평안한 잠을 자며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크리스에게는 최상의 선택 아닐까?
100광년 일기
나의 미래를 알 수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라는 다소 진부한 주제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제공한 소설. 재미있진 않았다.
내가 행복한 이유
행복은 단지 호르몬의 작용이거나, 물질적인 것으로만 표현되지 않는 어떠한 상위의 개념이다. 유물론과 환원주의로 대표되는 물질주의적 관점에 대한 역설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분명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기에 호르몬과 물질적 요소가 전제된다만, 그것 만으로 인간의 행복을 전권적으로 컨트롤할 수는 없다. 비물질적 인간성과 영혼과 같은 개념을 배제하더라도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사회문화적이고 경험적 측면이 내제된 복합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요소이다.
무한한 암살자
사이버펑크가 생각났다. 무한한 가능성의 평행우주를 전지적 관찰자가 아니라 1인칭 시점으로서 관망할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난다.
도덕적 바이러스 학자
까고 싶은 대상이 너무나도 명확해서, 패스.
행동 공리
여기서 말하는 공리가 notion일까, axiom일까 잘 모르겠지만, 상상도 하지 못한 신박함으로 전개되는 역설이 인상깊었다. 자신의 아내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살인마가 멀쩡하게 사회에 돌아다니는 것에 대한 분개로 그를 죽이기 위해 인간을 죽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상실하는 임플란트를 삽입하고 살인마를 죽이고자 한다. 그러나 살인마를 죽이는 것에 대한 양심의 둔감은 역설적으로 자기 아내에 대한 죽음또한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만들어버렸다.
마치 증명과정을 전개하다 최초의 공리에 대한 모순성을 발견하는 것 처럼, 우리가 느끼는 비인간성은 철저히 그 기반이 인간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충격적인 방법으로 설파한다.
내가 되는 법 배우기
자아란 무엇일까. 영속적이고 망가지지 않는 보석의 뇌를 가지게 된다면, 어느 순간부터 그 보석의 뇌 속 자아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많은 역사 속 인물들이 불로불사를 위해 헤매었다면, 보석의 뇌를 가지는 것 또한 인지적 불로불사를 이룬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람에 날리는 겨
‘엘니도’라는, 생물 병기가 작동한 아마존의 요새에서는, 회색 기사라는, 인간 인지의 회로자체를 변형하는 작업이 자행된다.
콘래드의 ‘암흑의 심장’에서의 ‘바람에 날리는 겨’는 단지 성서의 비유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는 몇 개의 기본 욕구를 가진 동물에 불과하고, 그 밖의 모든 건 바람에 날리는 겨보다 못하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작가는 해석했다.
고도의 기술의 발전이 결국 바람에 날리는 겨만도 못하다는 허무주의는 자주 다루어지는 이야기 중 하나이지만 인간 뇌의 인지적 측면에서 바라본 허무주의가 신선했다.
그외에는 인간이 바이러스와의 군비경쟁 속에서 살아가듯 정말로 어떠한 무기와 폭탄으로도 뚫어낼 수 없는 생태권의 성역이 발생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상상해 보았다.
루미너스
수학적 명제의 경계를 시각화한다는 독특한 발상. 모순이 발생하는 부분을 슈퍼컴퓨터로 전부 제거하려 했지만, ‘저쪽 세계’로부터 작용하는 일종의 반발력.
실버파이어
펜데믹 이전에 만들어진 소설이라는 것이 신기하다. 바이러스와 질병은 누가 봐도 의학의 영역이기에 과학과 의술이 발전한 현대에서는 이를 컬트적이고 주술적인 요소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믿고, 바라는 것을 사실로 전제하기에 여전히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광신적으로까지 보이는 미신들이 현대사회 곳곳에 매장되어 있다.
체르노빌의 성모
성물이란 무엇일까? 예수님을 못박은 못, 제사장의 잔과 촛대, 휘장은 신성을 머금은 성물일까? 모든 것은 알레고리이고, 의미가 부여된 존재라면, 의미가 전혀 결부되지 않은 순수히 가치중립적인 물질은 존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