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는 중에는 떠오르는 생각들이 적고 싶어 안달이지만, 글을 다 쓰고 나면 써야 할 과제가 되어 버려 글이 쓰기 싫어지는 것은 뭘까 모니카 매킨타이어와 니콜 오코너라는 두 여주인공의 생애를 현대사와 국제 정치라는 체스 보드를 누비는 두 퀸의 싸움으로 표현한다. 두 사람은 체스를 잘 한다는 점 외에는 거의 모든 사고방식과 가치관에서 차이를 보인다. 어원학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기를 즐기는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번에도 빼놓지 않고 주인공 둘의 이름에 큰 의미를 숨겨 두었다.

“맞아. 네 이름 니콜을 따온 그리스어 니콜라오스nikolaos는 ‘승리’를 뜻하는 nike와 ‘민중’을 뜻하는 라오스laos가 합쳐진 말이야. ‘승리하는 민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

승리하는 민중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니콜은 젊어서부터 공산주의와 마르크스 사상에 몸을 담고 있는 부유한 목장주인 아버지 루퍼트의 손에서 자랐다. 그로부터 체스를 배웠기에 니콜은 체스에서 가장 약하고 적은 가치를 갖는 기물인 ‘폰Pawn’을 이용해 견고한 장벽을 쌓는 전술을 능숙히 구사한다.

“이게 다 엄마가 내 이름을 ‘모니카’라고 지었기 때문이에요. 독점monopoly, 독백monologue, 일신교monotheism, 모노스키monoski, 모노키니monokini 같은 단어를 파생시킨 그리스어 모노스monos가 내 이름의 어원인 것이 지금 이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 말은 ‘혼자’라는 뜻이니까.

반면에 모니카의 이름 속 어원은 ‘monos’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인간 자체를 혐오하는 안트로포비아 증세를 가지고 있는 모니카는 개인의 뛰어난 능력과 역량이 인류 진보의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그의 생각과 부합하게도 모니카의 체스 스타일은 퀸과 나이트와 같은 능력있는 기물을 위시하여 기물 하나하나의 단독적 플레이를 구사한다. 1900년대 초반 1차 세계 대전 이후 동/서방이 진영논리에 입각하여 군비, 경제, 과학기술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경쟁했던 것 처럼, 작가는 상반된 성격과 가치관을 가진 두 인물의 성장을 대비시키며 백과 흑의 퀸이 국제 정세의 싸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가는 빌드업을 시작하게 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서술 방식이 으레 그렇듯이, 퀸의 대각선에서도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백과사전 (에드몽 웰즈 저)’ 를 통해 배경지식이나 특정 이야기의 모티브를 각주 형식으로 풀어낸다. 개미를 필두로 모든 책을 읽었던 나에게는 이젠 친숙하다 못해 익숙한 수준에 이르렀지만, 팬서비스라고 해야 할까 그의 모든 저서에 등장하는 에드몽 웰즈라는 인물과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백과사전의 대목을 볼 때마다 일종의 이스터에그를 목도한 것 처럼 모종의 쾌감을 느끼게 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 독자를 많이 의식한다는 사실 또한 눈여겨볼 만한 점이다. 이상하리만치 한국에서 그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에 비해 자신의 모국과 유럽, 서방권에서는 본인의 책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지는 못했기에 ‘세속적인’ 이유로 한국 독자들에 대한 애정과 그를 반영한 팬서비스가 책에 고스란히 실린 것일 수도 있다. 굳이 따지자면 이번에는 작가가 ‘의도하고’ 한국을 겨냥한 대목이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설명 한 번 밖에 없다. 이 또한 한국인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단 열 두 척의 배로 왜군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의 지략을 모니카의 전술 전략과 결부시키기 위함이기에 해당 대목을 읽으며 멋쩍은 웃음을 짓기는 했지만 베르나르 작가의 지금까지의 스타일을 보았을 때 그리 억지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체스라는 거대한 테마가 이 소설을 관통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그들은 체스 대회를 통해 첫 만남의 단추를 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힘겨루기는 아이슬란드라는 중립국에서 열리는 유소년 체스 대회에서까지 이어졌는데, 준결승에서 처음으로 만난 그들의 대국은 대국 자체의 결과보다도 후에 이어지는 상황들이 독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대국을 직접 보기 위해 탁자 주위를 빼곡히 채운 사람들의 시선과 대화, 숨소리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모니카는 대국 이후 그만 충동적으로 모니카의 목을 조르고 만다. 사건은 해프닝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잘못된 첫 만남은 그들을 평생의 라이벌이자 숙적으로 만들게 하는, 그리고 양쪽 진영의 ‘퀸’으로 역사를 바꾸도록 하는 증오의 동력이 되었다. 두 번째 대국 이후 니콜은 테러 협박 전화를 사주하여 건물을 빠져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니콜의 모친을 압사로 죽여버리고, 국제 정세의 체스판을 누비는 그들의 피의 대국은 막을 올린다. 니콜의 남자 친구이자, KGB(소련 연방의 비밀 정보부 단체)와 공산주의 자본가들의 돈줄을 이어 주던 라이언을, 자신의 손으로 총을 쏘아 죽이도록 하여 죄책감을 극대화시키는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들의 공방은 냉전 시대를 거쳐 가며 심화된다. 실제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인, IRA 무장 투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의 붕괴와 이란 핵 위기, 911테러 마저도 각색되어 그들의 손을 거쳐가지 않은 것이 없다.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사상과 국가를 등에 업은 두 퀸의 싸움에서 고수되는 한 가지 원칙은, 그들이 어릴 적부터 두었던 체스의 전술로 대표되는 그들의 세계관이 충실히 반영된다는 점이다. 산전 수전을 겪고 연로하고 노쇠하여 진 그들은 인생의 최후의 체스 대결을 펼친다. 그들의 대국 장면은 마치

문/이과적 성향을 떠나 글쓰기는 어떠한 사람에게나 필요한 능력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자아의식과 인식론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격언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사유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과정이 필수적인 것 같다. 사족 - 인간의 신체 또한 항상성 유지로 대표되는 ‘피드백’ 과정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이는 신체 또한 하나의 큰 시스템이며, 이 시스템을 ‘제어’하기 위하여서는 필수적으로 자신의 현재 상태를 반추하여야만 원하는 목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제어공학의 의미론적 가치를 함의한다. 머신 러닝, AI 등의 모델에서 필수적인 절차적 구성 요소는 forward propagation (순방향 진행/혹은 전파)와 backward propagation이 있다. 이 분야에 적용되는 테크닉과 방법에 대한 의미론적 함축이 분명 우리의 뇌와 학습 과정에도 적용가능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명하다. 인간의 뇌와 신경망을 본떠 만든 ‘인공’ 신경망, ‘인공’ 지능은 오리지널의 아주 작은 부분집합일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사유하는 행위는 ‘뇌’라는 모델에 일종의 정보, instruction을 입력으로 넣어주는 행위일 것이다. 그 안에서 계산이 일어나고(순방향으로 forward 하고) 무언가 결과가 나오긴 할 것이다. 그 결과는 모델의 inference일 뿐 어떠한 ground truth와도 비교되지 않는다. (어딘가 기록되어, 교정되고 수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글을 쓰는 행위는, 내가 가진 정보와 입력에 대해 연산을 수행하여 출력함과 동시에, 이를 지면에 받아 적어 기록하고, 퇴고하며, 내 글이 논지에 맞는지, 흐름은 정확한지 되돌아보는 과정이 수반된다. 구글에 내가 적는 내용이 맞는지, 어떤 단어와 표현이 있는지 검색하기도 하고, 내가 쓴 글을 챗지피티에게 넘겨 글을 교정해주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내가 infer 한 응어리진 결과물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수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정의 과정은 글 자체를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그 글을 만들어 낸 모델, 즉 우리의 뇌에 학습을 촉발한다. 이 것이 머신 러닝에서 말하는 backward propagation : 나의 추론결과와 정답(ground truth)를 비교하여 그 차이의 차분값을 모델에 피드백하는 과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분명히 그 형태나 의미론적으로 상동이다. 즉 그저 ‘사유’하는 것 만으로는 스쳐 지나가는, 용기에 담을 수 없는 조각구름처럼 생각이 지나갈 뿐이고, 이를 지면에 가감없이 기록하고, 교정하는 과정이 우리의 뇌를 가장 효과적으로 연단하는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이 복잡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존재의 비극성을 인식할 수 밖에 없어. 좋은 두뇌를 가졌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저주일지도 몰라.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기도 해. 그저 무리 속 늑대나 양이 되어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

마지막 대목은 분명 성서에 대한 곡해일 것이라 확신한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다는 그 표현 때문에 사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미루어 짐작한 것 같다. 이 대목에 밑줄을 쳐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