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읽었기에 약간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들

  • 의도적 PC감성 주입

의도가 느껴지는 동성애자 등장인물(보통 가족으로 설정함) →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전개로 만드는게 싫다. 이런 요소들까지도 PC주의의 일부라고 보기에는 다소 비약된 부분이 있기는 하다만은, 이야기의 전개상 주인공의 친오빠가 동성애자여야 할 이유가 있나? 드라마를 볼 때 PPL이 나오는거까지는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어도, 주인공의 메시지와 감정이 전달되어야 할 대사에 ‘이 제품을 썼더니 효과를 봤어요’ 같이 노골적으로 PPL을 집어넣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면 이런 코드를 집어넣지 않으면 명작으로 인정받지 못하기에 어쩔 수 없이 넣은건가?

  • 양자역학적 요소와 Fiction의 경계는 어디일까

당연히 이 책은 허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소설이고, 그 허구나 설정에 대해서 과학적 근거가 없니, 개연성이 없니 떠들어댈 생각은 아니다. 그정도로 진지충은 아니다.. 근데 허구성을 가정할거면, 굳이 양자역학을 차용할 필요가 있나? 작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네셔널 지오그래픽을 즐겨 본다던가, 북극의 빙하학자가 꿈이었던 인생을 묘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과학 분야에 조예가 깊던지 혹은 관심이 많던지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더더욱 양자역학을 끌어다 쓸 필요가 있을까? 어떠한 설정과 세계관을 집중적으로 묘사한 책도 아니면서 얼렁뚱땅 양자역학에 의하면, 사실 확률변수가 어쩌고, 그러니까 사실 모든 결정이 특정 상태를 확정하는거고 무한한 가능성의, 이런 말을 굳이 안넣어도 되지 않았을까, 애초에 죽음과 삶 사이의 빈틈에서 삶을 되돌아본다는 설정이라면 죽기 전 주마등 정도로만 적어뒀어도 개연성이 충분히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작가의 지적 허영심(?) (물론 내가 양자역학을 잘 알기에 이사람은 모르고 이런식으로 묘사를 하는거다, 이런 맥락이 아니다.) 혹은 청소년 독자들을 겨냥하여 그들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이렇게 쓴 건지 잘 모르겠다. 조금 생각해 봤는데 이건 프로 불편러의 영역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어쩌겠는가 내가 프로 불편러인데.. 그냥 읽다가 불편하게 느꼈다고.

책의 줄거리에 있어서는 딱히 신선하거나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지는 않았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살하는 주인공의 죽기 직전에 당도한 ‘자정의 도서관’. 그 곳에서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초등 학교 시절 또래와 적응하지 못하고 도서관에 틀어박힌 주인공을 챙겨줬던 사서 엘름 부인. 죽기 직전의 시간은 자정(00:00:00)에서 멈추고,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후회하였던 선택을 고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진다. 각 인생에서 진심으로 그 인생에 실망하게 된다면 다시 자정의 도서관으로 돌아가지만, 실망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인생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다. 실망감의 부재가 곧 행복이기 때문에.

노라는 자신의 결핍과 후회들을 되돌리기 위해 자신이 후회하고 있던 결정들을 하나씩 되돌린다. 맥주 펍을 차려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었던 미래도, 자신의 꿈이 아닌 남편의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왔고, 자신의 실수로 길에서 차에 치여 죽은 애완묘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미래에서는 오히려 고양이는 먼저 죽어버렸다. 어릴 적 국가대표까지 될 뻔했던 수영의 꿈 또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아닌 아버지의 꿈이었으며 자신이 동경하는 할리우드 스타 라이언 베일리 남자친구가 되었음에도, 그녀는 자신의 오빠가 이 세계에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정으로 행복하지 못했다. 자신이 했던 어떠한 후회를 돌이켜도 행복해지지 않음을 깨닫고 수많은 가능성의 인생을 점점 포기하려 하는 그녀 앞에, 자신과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는 남자를 만난다. 그에게는 도서관이 아닌 어린 시절에 즐겨 찾던 비디오 가게였지만 자신이 선택한 미래를 고르고, 만족하지 못할 때 다시 그 곳으로 돌아오는 ‘삶을 선택하는 방랑자’의 삶을 산다는 것에는 다름이 없었다. 이미 삼백 번 이상의 서로 다른 삶을 살아본 그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이동자’ 라고 불렀고, ‘삶의 의미만을 좇아 살다가는 제대로 살아낼 수 없다’는 말로 그녀에게 충고하기도 했다. 자신의 자정의 도서관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원래의 인생에서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를 수습해주었던 친절한 이웃이었던 외과의사 애쉬의 호의를 받아 그와 결혼했던 인생을 떠올리게 된다.

성실하고 잘생긴 애쉬와의 결혼 생활은 물론이고, 그녀의 작고 귀여운 딸을 양육하면서도 케임브릿지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자신이 좋아하던 학문에 전념하는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Phrases

‘후회의 책’을 멍하니 바라보며 노라는 부모님이 서로를 사랑한 적이 있는지, 아니면 그저 결혼 적령기가 되자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하고 결혼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음악이 멈출 때 가장 옆에 있는 사람을 붙잡는 게임처럼.

노라는 늘 그 게임이 싫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사랑을 두려워 하는 것은 인생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인생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이미 4분의 3이 죽어 있는 상태다.” 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게 노라의 문제인지도 모르다. 노라는 그냥 사는게 두려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트런드 러셀은 밥 먹듯이 결혼하고 불륜을 저지른 사람이었으니 저런 충고를 할 처지가 못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