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내가 생각해보니까 예념을 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 진짜 자신이 있는 사람이야. 엉터리로 살아온 사람에게는 예념을 할 용기 따위, 없어.”

녹나무의 파수꾼은 겉으로는 녹나무의 신비한 능력에서 오는 미스터리함과, 가문의 전통을 따라 이를 지키는 주인공 ‘레이토’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전개하고 있지만 인간의 념(念)을 전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에게는 예념을 할 용기가 있을까? 나의 마음 그대로를 누군가에게 전달할 정도로 투명하고, 올곧게 살아왔는가? 혹 그렇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나의 죽음을 넘어서까지라도 전해야 할 념이 있는가?

아직까지 나에게는 나의 념을 전달해주고자 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생각과 념이 내게 전해지기를 원하는 생각밖에 없는 것 같다. 오래 살지 않아서 갖고 있는 생각이나 가치에 대해 스스로 낮게 평가하기 때문에 내 생각들을 남에게 전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예념은 그렇다 치자. 수념을 한다면, 대체 누구의 마음을 알고 싶을까? 어릴 적 스스로에게 했던 상상 중에, 모든 인간들 중 단 한명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그 생각들을 다 보고 이해할 수 있다면 내가 좋아하면서도 힘들게 했던 사람의 모든 생각들을 따라가 느끼며 공감하고 싶다는 당시로써는 굉장히 낭만적인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소름끼치는 일 아닌가. 그 당시에도 역지사지로 상대방에게 내 생각을 온전히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도 없고 그저 내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대의 행동의 동기를 알기 위해, 혹은 주변 사람이 견디기 힘들 정도의 정신적 아픔과 결핍의 원천이 도대체 뭐기에 그런 행동을 할까, 알아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어릴 적 나는 이런 상상을 굉장히 많이 했었다.) 누구나 한번 쯤 해봤을 법한, ‘상대의 모든 생각을 알고싶다’, 다른 말로, ‘상대방의 머릿속에 들어가고 싶다’ 내지는 ‘하루 쯤 타인으로 살아보고싶다’ 라는 공상의 연장선상에 이 책의 컨셉트가 놓여있다.

누군가의 생각, 더 정확히는 ‘념’을 전달하되, 녹나무라는 장소적, 그믐과 보름이라는 시간적인 매칭에 의해 혈연관계라는 제한(혹은 살)을 붙여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갔다. 추리소설을 음미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은데, 하나는 작가가 제시하는 추리해야 할 요소(쉽게 말해 떡밥)이 나올 때마다 멈춰서 스스로, 혹은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개진하며 본인 입장을 정리한 뒤 이야기가 진행 됨에 따라 맞이하는 결말을 음미하는 방식이 있고, 책을 일단 끝까지 읽은 뒤 하나씩 되짚어 가며 자신이 놓친 부분이나 작가가 숨겨 둔 장치 따위를 찾아내는 식으로 음미하는 방식이 있다. 나는 주로 후자를 선호하는데, 작가와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나 결이 맞지 않다면, 혹은 내가 책을 집중해서 읽지 않아 작가가 숨겨 둔 단서들을 빼먹는다면 나의 추리는 엉망이거나 정답에 근접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런 입장을 가진 채로 결말을 맞이한다면 나의 생각과 괴리가 있는 결론에 수긍하지 못하거나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같은 작가의 추리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패턴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오히려 한 호흡으로 책을 읽고 다른 책들과 비교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즐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소설, 더 나아가 글의 장점이 원할 때 글의 흐름을 멈추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인데, 적어도 추리소설의 장르에서는 한 호흡 내에 모든 이야기를 흡수한 이후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는 편하게 느껴졌다.

‘념’이란 무엇일까? 어제 친한 친구와 이야기 하면서 인간의 ‘의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서로에게 설명하기 위해 몇시간이고 애를 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이야기의 시작은 MBTI의 N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나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여담이지만 내가 공상, 멍때리기 내지는 생각에 잠길 때는 영화 ‘인셉션’의 그것과 같은 식으로 수직적인 계층을 쌓아 생각을 이어나간다. 먼저 물질이 존재하는 이 현실의 세계를 0층이라고 하자. 그 세계를 나의 오감과 상상력을 동원해 나의 머릿속에 투영한 것이 1층이라고 한다면, 그 속에서 2층, 3층과 같이 점점 생각을 이어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층의 개념은 내가 현실에(더 정확히는 내 머릿속에서 재현한 1층의 현실에) 어떠한 가정을 부여하는 것일 수도 있고, 대화의 진행일수도, 시간의 경과(혹은 역방향의 경과) 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원래의 층에 대한 일정한 조작을 가하거나 상호작용을 취하는 것을 나는 층의 발달 (쉽게 말해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생각) 이라고 정의한다. 남들을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깊은 층수에 들어가 생각을 하고 있다가 확 0층인 현실로 돌아올 때면 내가 그동안 몇층에 있었는지 생각을 되짚어 보게 된다. 당연하게도 생각을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몇 층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인지하면서 생각을 할 수는 없다. 몇 층에 있는지를 따지려는 순간 의식이 원래의 생각에 오롯이 집중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얼마나 깊이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사후에 관찰하는 방법으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캐치해서 원래의 현실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를 추적해볼 수 있다. 그걸 통해서 의식의 포커스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내 생각이 어떠한 과정으로 발전되고 진행되었는지 ‘층’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 나의 생각의 회로를 설명하자면, ‘층’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으니 어떠한 빌딩의 형태처럼 등간격이고 일정한 크기의 생각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 형태는 직육면체의 빌딩이라기보다는 잎사귀가 듬성듬성 나있는 나무에 가깝다. 한 생각을 끝까지 발전시켜 잎에 도달하였으면 거기서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중간 체크포인트 (가지 끼리 연결되고 분리되는 부분)에 다시 돌아가 다른 가지의 잎을 탐색하는 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