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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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식으로 독후감을 써야 할지, 우연히 접한 브런치 독후감을 통해 갈피를 잡았다.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펜 닿는 데로 자유롭게 한번 써보려고 한다.
목가
책을 홍보하기 위해 적어둔 짧은 서평에 ‘목가’라는 말이 적혀 있었는데 그 단어의 뜻을 몰라 찾아보았다.
‘전원생활을 주제로 한 서정적이고 소박한 시가’, 목동들의 목축생활이나 지주, 농부의 농촌 생활 과정에서 작성된 문학작품을 일컫는다고 한다. 이 책이 ‘목가’라면 분명 우주 목가일 것이다. 가장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서야 느끼게 되는 벅차오르는 Mother Earth를 대면할 때의 감정. 지구를 바라보면서 향수를 느끼지만 유일하게 내 생명을 지탱해주는, 지구에 비하면 한낱 티끌과 같은 금속 캡슐 속에서, 다시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양가감정.
코스믹 호러는 ‘신’, ‘대자연’과 같이 우리가 감히 맞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하고 초자연적 현상에 직면하였을 때 느끼는 경외심과 엄습하는 두려움 등에 대한 장르이다. 이 책은 코스믹 호러 보다는 ‘코스믹 노스텔지아’ (우주적 향수) 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SF나 우주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는 스토리, 개연성, 전개에 집중하였다면 이 책은 내가 정말 우주 정거장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 처럼, 정말 우주에 갔을 때 느껴봄직한 감정들을 여실히 표현해주고 있다.
Man vs Robot
언젠가는 로봇이 이 일을 대체할 수도 있다.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볼 일이다. 이들은 때때로 생각해 본다. 로봇은 물을 마시고 영양소를 채우고 배설하고 잠을 잘 필요가 없다. 성가신 뇌액이 흐르지 않고 월경을 하지도 성욕이나 미각이 있지도 았다. 로켓에 과일을 실어 보내야 할 이유도, 몸속에 비타민, 항산화제, 수면제, 진통제를 채워 넣을 이유도, 깔때기와 펌프로 변기를 지어 사용법을 교육할 이유도, 소변을 식수로 재활용하는 장치를 설치할 이유도 없다. 로봇은 소변을 누지 않으며, 물을 마시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거나 요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볼 수 있는 눈이 없고 두려워하거나 기뻐할 심장이 없는 피조물을 우주로 내보내는 게 무슨 의미일까?
(중략)
우주비행사의 심장은 기어코 로봇과 다르게 움직여 지구 대기권을 떠나 밖으로 밀고 나간다.
별이 무수히 수놓아진 밤을 바라본 적이 있는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인류가 상상만으로 꿈꿔왔던 우주 여행은 모든 인간의 낭만성의 정점일지도 모른다. 물론 현실은 냉정하고 혹독하기에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인류’ 라는 업적을 누군가 달성한 이후로는 그 누구도 천문학적 비용을 그저 ‘낭만’을 위해 태우려 하지 않는다.
지구궤도를 도는 우주정거장에서 여전히 로봇이 아닌 사람이 근무하고 있는 이유는, 로봇과 같이 한 가지 과업에 특화되지는 못하지만 우주정거장에는 범용성과 유연성을 가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여전히 셀 수 없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여전히 수많은 과일과 음식과 비타민을 우주선에 실어 보낼 만큼 우주 여행에서 인간이 존재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우주적 관찰자 시점
열두 시간쯤 후면 태풍이 상륙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바다 한복판에, 절망스럽게도 지대가 낮은 섬에 산다. 할 수 있는 건 절박하게 몸을 낮추는 것 뿐이다. 모든 것을 겪고도 살아남지 않았던가. 집은 양철, 판지, 하드보드, 나뭇가지로 만들었다. 요즘은 태풍이 너무 잦고 규모도 커서 더 번듯한 집을 만드는 건 부질없다. 계속 잃느니 애초에 잃을 게 많지 않은 상태인 게 낫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것은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의 전망대에서 마천루로 빼곡한 도시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기분일지 모른다. 줌 아웃을 거듭해서 더 이상 당길 수 없는 한계까지 시야를 넓히는 것 만으로, 세상만사가 가소로운 한낱 애들 장난처럼 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부여한다.
어차피 다가올 태풍을 대비할 바에 잃을 게 많지 않은 상태로 만드는 것. 혹자는 타협이라, 혹자는 최적화라고 칭하기도 한다. 나일강의 범람을 슬기롭게 이용하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고대 이집트인처럼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현상은 맞서 싸우기 보다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것이 어쩌면 순리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신론과 무신론
넥은 가끔 숀에게 묻고 싶다. 우주비행사이면서 어떻게 신을, 그것도 천지를 창조한 신을 믿을 수 있느냐고. 하지만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알고 있다. 숀은 넬에게 우주비행사이면서 어떻게 신을 믿지 않을 수 있냐고 되물을 것이다. 결론은 나지 않는다. 넬은 끝없는 어둠이 맹렬하게 깔린 양쪽 창문을 가리킨다. 태양계들과 은하계들이 마구 흩어진 세계. 시공간의 왜곡이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시야가 깊고 다차원적인 세계. 이것 봐, 어떤 아름다운 힘이 아무런 의도 없이 내던져 놓은 게 아니면 이런게 어떻게 만들어지는데?
숀도 끝없는 어둠이 맹렬하게 깔린 양쪽 창문을 가리킨다. 태양계들과 은하계들이 마구 흩어진 바로 그 세계, 시공간이 왜곡된 바로 그 깊고 다차원적인 시야를.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힘이 충만한 의도를 가지고 내던진게 아니라면 이런 게 만들어질까?
‘무신론도 하나의 종교이다’ 라는 글귀를 어딘가에서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양비론을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무신론자들은 종교인에 대해 ‘너네 종교를 공부하고 믿는 거니?’ 라는 질문을 던지며 맹목적 신앙을 비판할 때가 많다. 역으로 무신론도 같은 반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성과 논리로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스스로 확신하며 무신론을 외치는 사람이 전체 중 몇이나 될까? 타성에 젖어서 과학이라는 방패에 숨는 사람들. 무신론에 대한 증거를 알아야 할 의무도, 필요도 없기에 본인이 속한 가정과 집단의 사회적, 환경적 맥락에 의해, 혹은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신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생겨 덮어놓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신을 변증하는 변신론을 공부하듯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하는 ‘변-무신론’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 보론 (김영 교수님의 과철이 Lec 16을 빌려)
이에 관한 철학적으로 생각해 볼만한 주제는, 어떤 것이 있음을(존재함을) 증명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난이도의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 예시로 변신론을 들기에는 너무 복잡한 주제이기도 하거니와 나의 지식이 부족하기에, 가공의 존재인 UFO(더 정확히는 외계 생물체)의 존재성에 대한 증명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UFO 음모론자인 A는, UFO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라며, 입증의 부담을 떠넘긴다. 그의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라고 생각한다. 귀신이나 영혼과 같은 것이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과학이 밝히기 전까지는 그런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 없다는 논지이다.
즉 UFO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UFO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것에 대해 알거나 모른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명제를 판단하는 ‘무지에의 호소 오류’의 예화이다. 이 오류를 범하는 사람은 입증의 부담을 슬쩍 반대편으로 떠넘긴다.
신의 부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모든 자연적 현상과 인과관계, 원인들에 대한 증명되지 않은 것들을 신에 의한 것으로 떠넘길 수 있는 이유에서 이다.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물의 맹목성을 증명하기보다는 철저한 인과율과 법칙에 따라 신의 존재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우주를 증명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철저한 인과율과 법칙에 대해 ‘왜?’ 내지는 ‘누가 만들었는데?’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시 신으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갑자기 부적절하게 느껴졌어. 우주비행사란 게 슬프고 좌절한 미국 남자들의 투영 같아서.
판타지, 넬이 말한다.
살아있음의 미학
진보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럼, 아름답지, 그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정말 아름답고말고. 그러면 원자폭탄은요, 기업 로고 모양으로 빛나게 우주에 쏘아 올리겠다는 위성은요, 프린팅 기술로 달의 먼지 표면에 세우겠다는 건물은요? 꼭 달에 건물을 세워야 하는 거예요? 나는 그냥 지금 이대로의 달이 좋은데. 그래, 그래, 그는 대답했다. 아빠도 그래, 하지만 그 모든 게 아름다워. 왜냐면 아름다움은 선함에서 오지 않거든. 너는 진보가 선하냐고 물은 게 아니었지. 인간도 선해서 아름다운 게 아니란다. 살아 있으니 아름다운 거야. 어린애처럼. 살아 숨 쉬며 세상을 궁금해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선한 지는 상관 없어. 눈에 빛이 감돌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야. 가끔은 파괴적이고 상처를 입히고 또 가끔은 이기적이지만, 살아 있기에 아름다워. 살아 숨 쉰다는 점에서 진보도 그렇단다.
‘살아있으니 아름답다’ 는 명제는, ‘시간이 흘러갈 때서야 아름답다’ 로 바꾸어 쓸 수 있다. 박물관에 박제된 죽은 동물과 곤충들을 보고 있으면 숨 막힐 것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지다가도 왠지 모를 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살아있는 것이 아름답다는 사고관과 살아있는 것에 대한 열망은 생물학적으로 끊임 없는 종족 보존을 통한 영생을 추구하는 생물의 본질적 특성과 결부된다. 인간의 필연적 욕망인 생존의 욕구가 본질적으로 생존과는 전혀 무관한 덧없음의 극치인 아름다움과 연결되는 것이 일종의 아이러니이다.
자투리 2
남근을 닮은 우주선을 우주로 쏘아 보내는 것 만큼 오만한 행동은 또 없다. 우주선은 자기애로 미쳐 버린 종족의 토템이다.
외설적인 묘사 치고 임팩트있게 다가오는 문구를 본적이 없는데, 그 반례를 찾은 것 같다.
치에 가족은 운명의 틈새를 비집고 나와 샛길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필연적으로 우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치에의 가족사를 한 마디로 정리한 문장이었다. 맥락을 모르더라도 문장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가?
압도와 순응
훈련 풀장의 잠잠한 물은 몸을 가만히 잡아 주지만, 우주는 다르다. 우주는 (악의는 없으나 그저 공허한 무심함으로) 당신을 기울어뜨리고 뒤집고 망치려 하는 흉포함과 욕망을 품고 있다. 그럴 때는 맞서는 게 아니라 순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런 점에서 이건 서핑을 닮기도 했다.
정면으로 승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 (eg. 파도, 우주) 앞에서 우리는 맞서는 대신 순응하고 받아들여 길들여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유물론에 입각해서 볼 때 이러한 귀결은 철저한 패배주의이자 실패의 결과이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신적 존재 앞에 고개를 숙이고 순응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모습을 아름다운 서사로 느끼곤 한다.
궤도에서 삶에 대한 감각은 단순해지고 유순해지며 너그러워진다. 생각이 달라서가 아니라 생각이 줄어들고 그만큼 선명해지는 까닭이다. 평소처럼 쇄도하지 않는다. 생각은 그를 찾아와 필요한 만큼만 흥미를 돋운 뒤 떠나 버린다.
친한 친구와 이야기 하며 나와 친구 모두가 ADHD인 것 같다고, 쇄도하는 생각의 흐름을 정갈한 문체로 뽑아 정리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했던 기억이 있다. 우주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명상이나 기도를 통해 생각을 올곧게 정리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목록 만들기는 어릴 적 치에가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나 불안할 때 하던 습관이었다.
한번은 여덟 살 무렵에 흔치 않은 것들 목록을 만들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여자 조종사였다. 엄마와 아빠, 선생님들에게 일본에 여자 조종사가 몇이나 있냐고 묻자 한 명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적어도 군대에는 한 명도 없다고 했다. 그 순간 굳세고 질서정연하며 겁이 없고 투명한 마음에 씨앗이 뿌려졌다.
마지막 문장이 재미있다. 그리고 나도 불안하고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 OOO한 것들 목록 만들기를 시도해봐야겠다.
시녀들
사랑해, 보고 싶어. 숀은 편지를 쓴다.
’시녀들’ 엽서 뒷장에는 아내의 손 글씨가 쓰여 있다. 왼손으로 꽉꽉 눌러 뒤로 삐뚜름하게 기운 글씨들은 각졌고 씩씩하다. 이것이 그립다. 하지만 오늘 당장 집에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숀은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몇 달 후 돌아갈 날이 오더라도 돌아가기 싫을 것이다. 고소 공포와 향수병을 일으키는 우주라는 약에 그는 중독되었다. 이곳에 있기 싫지만 동시에 늘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 갈망으로 긁힌 마음은 움푹 파였지만 텅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만큼 많이 채울 수 있다. 궤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이렇다. 당신을 두둥실 부푼 연으로 만든다. 당신이 아닌 모든 존재가 연의 모양을 잡고 높이 띄운다.
‘시녀들’ 이라는 그림은 시선에 관한 그림이다.
작품 속 모든 인물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더 정확히는 작품을 관찰하는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단 하나의 대상, 우측 하단의 강아지의 시선만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미술에 대해 문외한이다 보니 잘 몰랐는데 이 작품이 스페인의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작품이란다.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감정, 단지 주인공이 속해있는 곳이 모든 번민과 분란으로부터 자유로운, 우주이기 때문에 느끼는 특별한 감정이기 때문 만은 아니다. 나에게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고등학교 시절을 꼽을 수 있겠다. Mother Earth 처럼 나의 본질과 핏줄이 그곳에 속해있고, 나를 지탱해주는 기반이라고 말하기에는 비약이 있지만 분명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던 사람들과,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함께 살아 숨쉬고 있다. 그렇기에 고등학교 시절의 순간들은 내게 충분히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총평
아무런 목적성이 없는 (적어도 그렇게 간주되는) 우주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는다.
맹목성의 극치 속에서 의미를 찾을지, 잃어버릴지는 순전히 우주 속을 살아가는 스스로의 몫이다.
그래서 역시나, 우주라는 소재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