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L;DR

  • 아름다운 설국의 풍경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벼려낸 아름다운 목가적 소설
  • 설국의 풍경은 헛됨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고마코의 정열과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요코의 순수함의 감정을 담아내기에 충분했다.
  • 되려, 옅게 깔린 스토리는 자기 자신이 아닌 설국의 아름다움에 주목하기를 원하는 것 처럼 주인공의 자리를 양보하는 듯 했다.

내용

한량처럼 무위도식하는 중년의 남자 ‘시마무라’와, 그를 연모하는 게이샤(접대부) ‘고마코’, 전혀 때묻지 않은 순수한 소녀 ‘요코’를 중심으로 하여, 눈덮힌 작은 온천 마을을 배경삼아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

눈이 덮인 설국에 도착하였을 때 기차에서 본 투명할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 ‘요코’를 보게 되고, 여관에서 시마무라를 ‘요코’와는 다른 개구장이와 같은 순수한 고마코의 생동감 넘치는 사랑은 허무와 공허함에 빠진 시마무라 마저 바꿀 수 있을 듯 보였다.

작품이 고조되고 자신이 간병하던 도련님의 생명이 위독함에도 시마무라를 배웅하려는 고마코와, 그런 그녀를 붙잡고 애원하는 요코, 결국 누구보다도 덧없이 죽음을 맞이한 요코를 앞에 두고 펼쳐지는 광활한 설국의 은하수의 전경을 펼쳐보이며 벅차오름으로 이 책은 마무리된다.

감상

독자를 압도하는 설국의 풍경과 아름다움의 묘사에 넋을 잃고, 자연스레 등장인물과 사건의 전개는 등한시 된다. 작가도 사건의 진행이나 인물의 대화, 갈등 상황을 옅게 표현하되 주변 풍경과 자연의 묘사를 통해 인물의 심상을 전하는 방식으로 마치 독자가 전지적인 시야로 설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굽어 바라보는 듯한 착각을 준다. 우이하고도 고결한 자연 경관의 묘사는 계절의 흐름을 통해 날이 쌀쌀해짐에 따라 스러져 가는 풀벌레처럼 덧없는 시마무라의 마음을 가득 담아낸다.

가을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그의 방 다다미 위에는 거의 날마다 죽어 가는 벌레들이 있었다. 날개가 단단한 벌레는 한번 뒤집히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벌은 조금 걷다가 넘어지고 다시 걷다가 쓰러졌다. 계절이 바뀌듯 자연도 스러지고 마는 조용한 죽음이었으나, 다가가 보면 다리나 촉각을 떨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들의 조촐한 죽음의 장소로서 다다미 여덟 장 크기의 방은 지나치게 넓었다.

설국, p187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설국, p4

서두에 앞서 언급했던 것 처럼 「설국」 의 가장 유명한, 그리고 가장 널리 알려진 문장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라는 첫 문장이다.

나는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굳이 상상하지 않으려 해도 눈앞에 흰 이불을 펼쳐놓은 듯 생생한 눈의 향연이 그려지는 것만 같다.


깜박거리자 은하수가 눈에 가득 찼다. 시마무라는 흘러내릴 듯한 눈물을 참으며,

“매일 밤 이런 은하수인가?”

“은하수? 예뻐요. 매일 밤은 아니겠죠. 아주 맑네요.”

은하수는 두 사람이 달려온 뒤에서 앞으로 흘러내려, 고마코의 얼굴이 은하수에 비추어지는 듯했다.

(중략)

올려다보고 있으니 은하수는 다시 이 대지를 끌어안으려 내려오는 듯 했다.

(중략)

발에 힘을 주며 올려 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스며드는 듯 했다.

설국, pp242-254

유명한건 첫 문장인데 마지막 문장도 그에 못지 않게 아름답다. 소설에서 첫 문장을 잘 쓰는 게 어려울지, 아니면 마지막 문장을 잘 쓰는게 어려울지 고민했다. 첫 문장이 유명한 소설은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데 반해 마지막 문장이 울림을 주는 소설은 희귀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모든 내용을 포괄하는 완결성을 가지면서도 임팩트 있어야 하는 마지막 문장의 시의성이 첫 문장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책의 말미에서 ‘불’이라는 소재와 ‘은하수’라는 소재로 각각 근경과 원경을 묘사하였다. 활력과 생기의 상징인 불과 장엄하고 웅장한 은하수의 조화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독자 또한 벅차오르게 한다.

고마코의 목소리는 소방대원들의 외침이나 사람들 발소리와 어우러져 밝고 들떠 있었다. 시마무라도 몸이 가벼웠다.

설국, p246

소중한 가족과 집을 집어삼킨 ‘화마’로 묘사되기는커녕, 밝고 들뜬 감정으로 표현되는 ‘불’은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활활 타오르는 불의 배경에 수놓아진 융단과 같은 은하수, 흰 눈으로 뒤덮힌 설국의 산맥들.

아아! 은하수, 하고 시마무라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은하수 속으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은하수의 환한 빛이 시마무라를 끌어올릴 듯 가까웠다. 방랑 중이던 바쇼가 거친 바다 위에서 본 것도 이처럼 선명하고 거대한 은하수였을까.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 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춰지는 느낌이었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일 뿐 아니라, 군데군데 광운(光雲)의 은가루조차 알알이 눈에 띌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의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였다.

설국, p238


작가의 자연 묘사는 소스라칠 정도로 생동감있고 섬세하다.

적당히 피로해졌을 무렵, 문득 방향을 바꾸고는 유카타[浴衣] 자락을 걷어 올려 한달음에 뛰어 내려오자, 발밑에서 노랑 나비가 두 마리 날아올랐다.

나비는 서로 뒤엉키면서 마침내 국경의 산들보다 더 높이, 노란빛이 희게 보일 때까지 아득해졌다.

설국, p39

자세히 보니, 반대쪽 삼나무 숲 앞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잠자리떼가 흐르고 있었다. 민들레 솜털이 떠다니는 듯했다.

산자락의 강물이 삼나무 가지 끝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흰싸리 같은 꽃이 높다란 산 중턱에 흐드러지게 피어 은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을, 시마무라는 지루한 줄 모르고 오래 바라보았다.

설국, pp124-125

사방의 눈 얼어붙는 소리가 땅속 깊숙이 울릴 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별무리가 바로 눈앞에 가득 차면서 하늘은 마침내 저 멀리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서로 중첩된 국경의 산들은 이제 거의 분간할 수가 없게 되고 대신 저마다의 두께를 잿빛으로 그리며 별 가득한 하늘 한 자락에 무게를 드리우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맑고 차분한 조화를 이루었다.

설국, p60

눈이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 듯 일부러 도랑을 내어 목욕통에서 넘치는 뜨거운 물이 여관의 벽을 따라 흐르게 해 놓았는데, 현관 앞에서는 얕은 샘물처럼 퍼졌다. 검고 늠름한 아키타[秋田] 개가 그곳의 댓돌 위에 올라앉아 오래도록 그 물을 핥고 있었다. 창고에서 꺼내 온 손님용 스키를 내다 말리느라 희미한 곰팡이 냄새가 더운 김으로 달착지근하고, 삼나무 가지에서 공동탕 지붕으로 떨어져 내리는 눈덩이도 따스하게 모양이 일그러졌다.

설국, p66

소설을 비롯한 산문은 정경 묘사에 강점이 있는 글의 갈래이다. 모든 종류의 심상을 십분 활용하면서도 절제된 표현을 활용한 단아한 문체로 쓰인 글을 음미할 수 있었다. 마치 even하게 익은 글을 보는 듯 하다. 특히 계절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글의 색채 가운데 정갈한 일본 정서가 투영되는 것 처럼 느껴졌다.


작가의 이러한 묘사의 방식은 비단 자연경관에 국한되지 않는다. 직유법적 화법으로 신체의 부분을 자연물에 비유하기도 하고, 때로는 미세한 행동 변화의 적절한 묘사를 통해 미묘한 심리상태를 표지하기도 한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마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이러한 시마무라의 자기 본위의 행동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설국, p222

누에처럼 고마코도 투명한 육체로 여기서 살고 있을까 생각했다. **

설국, p74

여자가 살포시 얼굴을 들자, 시마무라의 손바닥에 맞대고 있던 눈꺼풀에서 코 양쪽까지 발개진 것이 짙은 분 화장 밑으로 비쳐 보였다. 그 모습은 이 눈 지방의 추운 밤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까만 머리 빛깔이 하도 강한 나머지 따스하게 느껴졌다.

설국, p53

예시를 든 몇몇 단락 이외에도, 작품 도입부에서 ‘요코’를 관찰한 묘사, ‘고마코’가 정식 게이샤가 되기 전 ‘시마무라’를 처음 만났던 과거 회상 장면 등 많은 부분에서 세세한 인물의 감정 묘사가 돋보인다.

시마무라가 다가온 것을 알고 여자는 난간에 가슴을 대고 푹 엎드렸다. 그것은 연약하기보다 이런 밤을 배경으로 이보다 더 완고한 것은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시마무라는 또 시작인가 싶었다.

그러나 산들이 검은데도 불구하고 어찌된 셈인지 온통 영롱한 흰 눈으로 뒤덮인 듯 보였다. 그러자 산들이 투명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하늘과 산은 조화를 이룬 것이 아니다.

설국, p61

작품 해설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대 문학이 등한시했던 자연에 대한 묘사, 그로 인해 자연을 표현하는데 낡고 구태의연한 단어만을 떠올리게 되었다는 결과를 절감한 작가의 시의적절한 표현의 선정이 돋보인다.


자신이 과연 살아 있기나 한 건가 하는 가책이 깊어졌다. 이를테면 자신의 쓸쓸함을 지켜보며 그저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것뿐이었다. 고마코가 자신에게 빠져드는 것이 시마무라는 이해가 안 되었다. 고마코의 전부가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불구하고, 고마코에게는 시마무라의 그 무엇도 전해지는 것이 없어 보였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마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이러한 시마무라의 자기 본위의 행동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설국, p222

그러나 요코가 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부르기가 왠지 꺼려졌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 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닿았다. 그는 고마코가 가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워졌다. 이러한 모습을 무심히 꿰뚫어 보는, 빛을 닮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 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렸다.

설국, p181

‘모든 것이 헛수고다’ 라고 생각하는 시마무라이지만, ‘헛수고이지만 그럼에도 순수하게’ 비치는 고마코의 정열과 요코의 순수함을 허무의 눈으로 지켜본다.

고마코를 만나면 댓바람에 헛수고라고 한 방 먹일 생각을 하니, 새삼 시마무라에겐 어쩐지 그녀의 존재가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졌다.

설국, p84

도쿄에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무위도식하며 홀로 여행을 떠나 게이샤에게 마음을 품는 시마무라를 도덕이나 윤리의 잣대를 들이밀려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볼드 한 부분의 표현으로 연모, 애정, 애착 같은 단어를 쓰려 했는데 상황에 가장 부합하는 ‘affection’이라는 단어를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해도 어울리지 않아 ‘마음에 품는’으로 풀어 썼다.)

염세적으로 보일 정도로 허무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시마무라와, 헛수고임을 알면서도 그를 향한 야성적인 정열은 애절하면서도 고귀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당신을 경멸하지 않으면 말하기 힘들어.”

“마음에도 없는 말씀. 도쿄 사람은 거짓말쟁이라서 싫어요.”

“그것 보라고, 내가 이야길 꺼내면 말을 돌려 버린다니까.”

“돌리는 게 아녜요. 그래서 당신은 정말로 믿었나요?”

“믿었어.”

“또 거짓말이군요. 믿지 않고선.”

설국, pp92-93

고마코 스스로도 헛수고임을 알면서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덧없는 사랑은, 위중한 도련님을 버리고 시마무라를 배웅하려는 그녀의 행동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서평

5천원으로 일본여행 감성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오감에 의한 자극보다 상상력에 의한 자극을 더 크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진짜 여행보다 더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책이라고 해서, 서울대학교 필독서에 지정된 책이라고 해서, 누군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추천한 책이라고 해서 좋은 평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최대한 탈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누군가 좋다 했기 때문에 그 흐름에 동조하는 것은 영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첫문장 하나 잘지어 노벨 문학상 받아간 책이라는 명색에 어긋나지 않게 이 책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소설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옅은 등장인물과 사실 관계 묘사에 반해 눈앞에 뚜렷이 그려지는 설국의 전경을 통해 글이라는 2차원에 국한된 고리타분한 매체를 통해서도 이렇게나 생동감 넘치는 풍경을 전달할 수 있구나, 마음을 전달할 수 있구나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묘사의 방법에 있어서는 함축하고 간결한 표현을 쓰기 보다는 여과없이 생생한 설경을 구체적이고 자세히 표현한다. 처음 보는 종류의 소설이었고,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 자체로 아름다웠고 손에 쥐면 녹아내릴 듯한 손에 쥘 수 없는 눈송이를 바라보는 것 같은 감상을 주었다. 덧없음의 아름다움, 덧없음에도 한없이 진지하고 정열적인 사랑을 하는 고마코와, 바라만 보아도 녹아 없어질 것 같은 투명한 요코를 대조적으로 표현한다. 덧없이 아름다운 설국을 활활 타오르는 불에 스러진 요코를 뒤로 하고 마치 파노라마를 보는 듯 한 광활한 설국의 하늘에 보는이를 압도할만한 은하수를 수놓는 것으로 방점을 찍는다.

고마코의 헛된 사랑도, 요코의 가녀린 모습도 설국의 풍경을 더욱 생생히 묘사하기 위한 것임을 느낀다. 아주 나중에 이 책을 누군가 언급하면, 여행객과 게이샤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설국의 풍경을 상세히 묘사한 그림책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